한국차산업 발전은 좋은 차를 만드는 제다법에 의해 결정된다. 인터넷 일간 신문 <차와문화>는 한국차산업의 발전을 위해 제다법에 대한 건강한 논쟁을 시작한다. 그리고 조만간 대중들과 함께하는 공개품평대회를 가질 예정이다. 지난 5월 5일 중앙일보 중앙선데이에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박동춘 이사장의 한국 녹차 제다법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이후 백운명차문화원 법진스님이 첫 번째 두 번째 편지를 보내왔고 박동춘 이사장이 특별기고문을 보내왔다. 이같은 지면토론에 대해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최성민 소장 기고문을 보내왔다. 최소장의 기고문에 법진스님이 3번째 편지를 보내왔다. 법진스님의 기고에 대해 최성민 소장의 두 번째 기고 전문을 싣는다. 이에 대한 다양한 반론도 환영한다. <편집자주>

법진님은 내가 법진님의 글을 잘못 파악했다고 한다. 법진님이야말로 내 글을 잘못 읽은 것 같다. 나는 “두 분의 토론을 격려하고 이런 류의 토론이 어떤 형태로든 지속 또는 재발화되기를 바라는 소망으로 ‘한국 차의 심각한 문제’와 ‘한국 차 부활책’에 관한 소견을 적는다.”고 했다. 즉 법진님의 글에 대한 비판이나 논박이 아니라, 한국 차계의 ‘발등에 떨어진 불’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 차의 망조와 해결책 모색에 대해 한국 차의 운명을 걱정하는 차인으로서 평소 지녀온 생각을 적은 것이다.

법진님은 말씀한다. “나는 두번의 공개편지에서 단 한번도 구증구포를 내 세운 적도 없고 또한 다도에 대한 글을 단 한 줄도 쓴 적이 없다...”고. 그러나 그 분은 이전의 글에 이렇게 썼다. “제다에서 구증구포, 역시 말 좋아하는 사람들의 표현에 불과하다. 한국의 제다가 실체가 없이 말장난으로 갑을박론하기 때문에 소비자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일이다.” 그렇다면 ‘구증구포’가 어떻다는 말인가? 박동춘님의 진지한 ‘구중구포’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치고는 애매해서 진의를 알 수 없다. 그러면서 법진님은 글의 표현력 보다는 진정성을 강조한다.

『주역』 계사상전 12장에 “書不盡言, 言不盡意. 然則聖人之意其不可見乎?(글로는 말을 다하지 못하며 말로는 뜻을 다하지 못하니, 그렇다면 성인의 뜻을 그 가히 보지 못하는 것인가!)라는 공자 말씀이 나온다. 물론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도 있다. 그러나 이 토론은 불립문자로 뜻이 통하는 득도한 성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범인凡人 중생衆生을 위한 것이다. 글의 표현력이 충분해도 글쓴이의 속뜻을 다 전하기 어려운데 표현력을 무시하거나 표현력 탓을 한다면 어떻게 일반인들에게 진정성을 전달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수행인으로서 대중들이 진면목을 보지 못하고 간판으로 차를 판단하는 작태를 보면서 왜 간판을 계속 걸어두고 계시는가?

법진님은 “올해 내가 사는 광양 다압 농협에 차 공장은 차를 한통도 만들지 않았다고 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으나 가는 곳 마다 차와 차를 마시는 도자기를 생산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힘들어 생활하기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차를 찾는 사람도 드물고, 찻그릇을 찾는 사람도 많이 줄었다고 했다. 이러한 소리는 어제 오늘 일은 아니다.”라고 했다. 한국 차가 망해가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말씀이다. 그런데도 한국 차가 망해가고 있는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니, 차를 오래 만들어 오시면서 한국 차의 제 문제에 대해 남다른 고민과 연구를 했을 분으로서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단지 그 탓을 제다 현장에 와서 선물할 차까지 직접 만들어가는 차 단체 사람들에게 돌렸다. 그런데 그들의 말에 답이 있지 않은가? “차를 제대로 잘 덖는 사람이 없어서 직접 만들어 간다.” 나는 ‘차를 제대로 잘 덖지 못한다’는 말이 차에서 가장 중요하고 다도를 주도하는 차의 향을 제대로 내는 차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법진님이 향에 대해 문제제기한 바, 차향의 원형은 생 찻잎의 화~한 허브틱한 방향芳香이며 이를 완제품에 얼마나 보전해 내느냐가 제다의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초의는 『동다송』에서 ‘다도’를 규정하기를 ‘채진기묘 조진기정 수득기진 포득기중’을 준수하면 다도가 다 된 것이라 했다. 이 구절에서 대부분의 차인들이 한문 해석을 잘못하여 차향의 중요성과 초의 다도의 진의 파악을 제대로 못하는 게 한국 차계와 한국 차 운명의 비극이라고 생각한다. 채진기묘‘採盡其妙’를 ‘찻잎을 딸 때 그 묘함을 다하라’고 해석하니 도대체 무슨 뜻인가? 이는 ‘찻잎을 딸 때 찻잎이其 품고 있는 신묘함妙, 즉 신묘한 정기인 차향을 잘 보전하라는 말이다. 또 ‘조진기정造盡其精’을 ‘차를 만들 때 정성을 다하라’고 번역하는 것 역시 오역이다. 왜 차를 만들 때만 정성을 다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其)는 무엇을 뜻하는가?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그’(其) 역시 찻잎을 의미하며 ‘기정其精’은 찻잎에 들어있는 정기, 즉 차향을 가리킨다. 그리하여 잎을 따고 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신묘함과 정기로 일컬어지는 차향을 잘 보전하고, 좋은 물을 얻어(수득기진) 그 물에 적정량의 차를 넣어(포득기중) 우려낼 때 차향이 정상적으로(正) 발현되니, 그 정도면 ‘다도’가 잘 이루어진 것이라는 게 초의의 다도 개념이다.

이상은 나의 앞 글에서 했던 말을 중언부언한 셈이나 한국 차의 위기 원인을 타진하고 그 돌파구를 모색할 때 가장 중요한 관심사이어야 하기에 좀 더 풀어 설명한 것이다. 나는 “불 온도. 손놀림의 강약, 차 맛 내는 것 전부!”라는 법진님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단 ‘차 맛’이라는 표현보다는 차 맛을 포괄적으로 상징하는 ‘차향’으로 대치하면 어떨까? 그리고 그 불의 온도와 손놀림의 강약에 대해서 좀 더 상세히 설명해 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글. 최성민 (사)남도정통제다·다도보존연구소 소장. 곡성 산절로야생다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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