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국의 봄바람 부드럽게 일어날 때/ 차 숲 잎사귀 밑에 뾰족한 부리 머금었네.연한 싹을 가려내면 아주 신령스레 통하는 것/그 맛과 품류는 육우의 <다경>에 수록되었네.

자순紫筍은 기旗와 창愴 사이에서 뽑아낸 것/봉병鳳甁이나 용단龍團은 차 모양을 두고 하는 말. 푸른 옥병속에서 뜨거운 불로 끓여낼 때/게 눈 같은 거품 일며 솔바람 소리 나네.

깊은 산속 집 고요한 밤에 손님들이 둘러앉아/ 운유차 雲腴茶 한번 마시면 두 눈이 밝아지네. 당태위의 풍미를 슬쩍 맛본 촌사람이/ 어찌 알리, 설차雪茶가 이처럼 맑은 줄은.

하나의 인격대명사화 된 차인茶人이라는 말은 우리시대 무엇인가. 차인은 곧 차 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음악, 꽃등 실용인문학 전 분야 뿐만 아니라 평등과 자비 그리고 나눔을 실천하는 상위 인격체를 담보해낸 사람을 뜻한다. 차인을 한마디로 말하면 전인적인 인격체와 동의어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차인을 경외스러운 눈으로 대접한다. 적어도 옛 차인들은 그랬다. 권력을 가진사람도, 권력을 잃어버린 사람도 차를 마시며 세상과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봤다. 그리고 눈이오면 눈을 담아 차를 마시고, 비가 오면 비를 감상하며 차를 마시며 찾아온 지인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옛 차인인 김시습은 차인으로서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전형이다. 권력으로부터 촉망받는 천재에서, 권력으로부터 탄핵받는 천재로 시대와 끝없는 불화를 그는 차를 통해 이겨낸다. 그는 무상함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차와 함께 살아간다.

우리시대는 그 어느 때 보다 많은 차인이 있다. 혹자는 400만이라고 하고, 혹자는 200만이라고 한다. 단순히 산술비교하자면 전 인구 중 5명중 1명은 차를 마신다는 계산이다. 아마도 한국 차 문화 역사상 가장 많은 차인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계내부에서도 차계외부에서도 차인은 없다는 목소리가 높다. 우리는 지금 차를 마시는 사람이 차인인지, 전인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는 사람이 차인인지 구분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른바 차 관련 공부를 하고 차를 마시면 그냥 차인이고 선생님이 돼버린다. 차인은 없고 차를 마시는 사람만 있는 것이다. 사당화되고 권력화된 차계의 행태가 변하지 않는다면 한국차문화의 미래는 암울하다. 지금이라도 삶속에 녹아든 문화인격체로서 차인의 길을 가는 것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소외와 고통속에 힘들어하는 우리시대 모든 사람들과 함께하는 차의 세상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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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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