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차문화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것은 그간 차 관련 학문적 성과에 대한 진전이 없기 때문이다. 자료의 부족, 연구부족의 결과이다. 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연구결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이른바 정황추측만으로 잘못된 사실을 이른바 ‘당위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근현대차문화의 역사뿐만 아니라 과거의 차 문화 역사 역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사실에 입각한 연구결과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향후 차문화복원에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보여진다. 본 기사는 미디어붓다에 실린 정서경 박사의 <한국 근. 현대 차 문화 전승의 줄기를 캐다>란 세 번째 기고문이다. 본 기사에 실린 사진의 저작권은 정서경박사에게 있으므로 무단 전재를 금합니다. 본지는 정서경 박사의 기고문에 대한 반론에 대해서도 게재할 방침이다. 독자제현의 많은 관심이 있기를 기대한다.<편집자주>

응송스님의 상좌 대흥사 탱화장 낭월스님의 3남 고성주선생
응송스님의 상좌 대흥사 탱화장 낭월스님의 3남 고성주선생

아버지가 대흥사 탱화장 금어(金魚) 낭월(浪月, 1924~2005 甲子生), 속명은 고재석(高在奭) 법명은 무영 재섭(無影 在燮)이다. 낭월은 화명(畵名)이다. 아버지는 늘 1년 양식으로 차를 만들었기 때문에 가족들이 총 동원되어 산으로 들로 차를 따러 다녔다. 가장 많이 갔던 곳은 진도 용장산성 쪽이었다. 원래는 대웅전 주변에 차밭이 있었다. 지금 나한전 자리 옆으로 기억한다. 대흥사에서 생활할 때는 그 밭의 차를 주로 따서 만들었다. 아버지는 대흥사 이야기를 많이 들려 주셨다. 당시의 정황도 정황이었지만 선대 승려들에게 들은 이야기로 아버지의 개인사를 대변하기도 하였다.

대흥사는 초의선사 계실 때부터 도량에 차나무를 많이 심었다. 대웅전 주변에는 차나무 천지였다. 어려서 대흥사 경내는 본인의 놀이터라 할 정도로 빠삭(세밀)하게 알고 있다. 대흥사의 차밭이 왜 우리들의 천신(차지)이 되었냐면? 이승만 정권 때 종교 개혁한다고 깡패들 동원해서 자유당 조직 만들어서 절을 뺏을 때, 절을 강제 점령했다. 무력으로. 그런 상황에서 새로운 실세들이 절에 들어왔는데 녹차가 있어도 그 사람들은 차를 몰랐다. 나무 자체를 몰랐다. 그래서 우리는 그 좋은 차를 따다가 만들고 마시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초의선사가 누군지? 차나무가 뭔지? 일지암이 어디에 있는지? 그 자체를 몰랐던 사람들이었다.

해남 옥천 탑동으로, 진도 용장산성으로 차 따러 다녀

응송스님 상좌 탱화장 낭월스님. 낭월은 화명 법명은 무영 재섭 속명은 고재석.
응송스님 상좌 탱화장 낭월스님. 낭월은 화명 법명은 무영 재섭 속명은 고재석.

그런데 어느 날 차 따러 갔더니 뭔 건물 지은다고 차나무를 하나도 없이 싹 밀어버렸다. 너무 황당했다. 그래서 식구대로 해남 진도까지 차를 따러 다녔다. 대체로 절터에는 거의 차나무가 있었기 때문에 절터나 사찰 주변에는 어디든 차가 있었다. 해남 옥천 탑동에 가면 야생차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옥천하고 진도 용장산성 부근에 야생차를 따러 다녔다. 그쪽은 꽤 차나무가 많았다. 그래서 식구들 총 동원에서 점심 도시락 싸 가지고 날 잡아서 하루를 허비하고 갔다. 그러면 용장산성 부근하고 그쪽에서 따고 마을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소나무 숲속에, 그리고 대나무 속에 차나무가 많았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죽로차라고 할 수 있었다. 대나무 밑에서 자란 찻잎들이 참 좋았다. 식구들대로 따다보면 그래도 꽤 많이 땄다. 그것을 들고 와서 차를 만들다보면 하루 종일 걸릴 때가 많았다. 정말 하루 내내 차를 만들었다.

구증구포는 제다 용어 아니다

낭월스님의 아버지. 초우상선의 진영. 초우스님은 편양언기파. 부자가 차독이 달랐다.
낭월스님의 아버지. 초우상선의 진영. 초우스님은 편양언기파. 부자가 차독이 달랐다.

흔히 우리가 구증구포라고 해서 그 말이 굉장히 많이 제다 용어로 쓰이고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아니다. 구증구포로 차를 만들 수 없다. 대여섯 번 덖으면 차를 더 이상 만들 수가 없게 된다. 우리차 찻잎을 따오면 정말 봄에는 여리고 부드럽다. 그래서 상추에 찻잎 몇 개 넣고 된장 놓고 쌈 싸서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그렇게도 했는데, 그걸 가지고 와서 만들 때 무쇠솥에 덖는다. 엄청 무거워서 들 수도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 솥 밑바닥이 구멍이 나 있다. 무쇠솥도 세월은 못 이기나보다. 우리는 무쇠 솥에 불 때서 차를 만들기 때문에 연기도 올라오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불길이 세기도 하고 약하기도 하고 해서 그래서 그걸 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 가스로 만드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다보면 구증구포를 할 수가 없다. 보통 대여섯 번이라고 하는 것은 솥에서 덖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덖고 비비고 털고 덖고 건조까지를 포함한다. 다 만들면 그때는 저장용기도 그다지 흔하지 않아서 노란 봉지, 우리가 흔히 ‘해가리포대’라고 했던 그런 봉지에 담아서 아랫목에 놔놓곤 하셨다. 곰팡이 피지 말라고 방에다, 그러면 녹차가 오래가면 향이 없어졌다. 밀봉을 해도 차향은 없어진다. 그런데 아버지가 드시는 다법은 지금 흔히 하는 탕법과 매우 달랐다. 흔히 물을 조금 식혀서 부었는데 아버지는 뜨거운 물 그대로 부었다. 물을 끓이면 바로 부어 드셨다. 왜냐면 지금처럼 옛날 스님들이 그렇게 먹었던 사람 하나도 없었다.

할아버지도 승려로 법명은 초(初)자 우(雨)자…은사는 예암 광준

범해각안의 다가에 나오는 예암스님의 영정. 옛 법대로 차를 잘 보관하였다고 한다.
범해각안의 다가에 나오는 예암스님의 영정. 옛 법대로 차를 잘 보관하였다고 한다.

우리 녹차가 이렇게 활성화 된 것은 전부 일본의 영향이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으로 전래된 녹차가 다시 역수입되면서 일본화 된 것이다. 처음에 우리 어렸을 때 차를 마셨을 때와 너무 달라 정말 너무 웃겼다. 우리는 그냥 차를 아주 편하게 물만 끓여 부어서 따라 마셨던 것을 어릴 적부터 해왔기 때문에 절차나 형식 자체가 없었다. 요즘 사람들 차하는 것 보니까 무릎 꿇고 하는 것이 이건 쇼도 아니고 뭐 좌판 벌려놓고 하는 것처럼 하는 것 보고 정말 놀랐다. 녹차는 가장 편하게 먹는 것이고, 가장 좋게 먹는 것이 혼자 먹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들은 배웠다. 참선하기 위해서 그래서 혼자 마시는 차가 가장 좋고 둘이 마시면 혼자일 때 보다는 조금 시끄럽긴 해도 그래도 좋고 그런데 좌판 벌려 놓고 보이주기 식의 쇼는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당신이 쓰시던 무쇠 주전자가 있었다. 그 주전자를 숯불 화로에 올려 찻물을 끓였다. 주전자에 꽃게가 조각이 되어 있는데 할아버지 때부터 전해 내려온 아버지 유물이다. 아버지의 다법은 그렇게 물을 끓여서 큰 잔에다 한번 차를 내려 마신다. 할아버지 대부터 물려주신 잔이 있었다. 할아버지도 대흥사 승려였다. 법명은 초우 상선(初雨 祥善) 속명은 상규(祥圭)이다. 그의 은사스님은 예암 광준(禮庵 廣俊, 1834~1894)이다.

예암스님은 대흥사 초의 이후 그 법맥을 이은 제자

범해각안 <다가(茶歌)>에 나오는 옛 법 따라 차를 잘 보관하던 승려

할아버지때 부터 내려오는 찻잔. 아버지는 종종 사용하셨다.본인은 아까워서 두고두고 보면서 선대 차인들을 기리고 있다고...
할아버지때 부터 내려오는 찻잔. 아버지는 종종 사용하셨다.본인은 아까워서 두고두고 보면서 선대 차인들을 기리고 있다고...

범해 각안의 <동사열전> ‘예암선사(禮庵禪師)’에는 “스님의 법명은 광준(廣俊)이고 예암은 법호이며 성은 최씨로 전남 영암 사람이다. 어릴 때 해남 두륜산으로 들어가 포운(浦雲)스님의 문하에서 스님이 되었다. 예암은 이어 만휴(萬休)스님의 계단에서 구족계를 받고 은사 포운스님에게서 법인을 전수 받았으며 범해 스님에게서 대승보살계를 받았다. 이후 스님은 범해·응화·보제·운곡 스님의 문하로 찾아다니며 경학을 더욱 깊이 공부하였다. 수승(승려 가운데 제일 높은 사람)의 소임을 맡아 보았고 총섭의 직첩을 받았으며 자헌대부의 교지를 받기도 하였다. 연담의 5세 법손이고 은암의 법손이다. 예암스님은 조선 순조 34년(1834) 갑오에 태어나 고종 31년(1894) 갑오에 입적하였으니 누린 나이 61세였다.”라고 기록되었다. 범해 각안의 <다가(茶歌)>에 나오는 대흥사 10명(中孚․离峯․無爲․禮庵․南坡․靈湖․霽山․彦銍․聖學․太蓮)의 승려 중 네 번째다.

정민 교수의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 638쪽에서 642쪽의 번역을 그대로 빌리자면 예암은 옛 법 따라 차를 잘 보관하던 승려 ‘옛 법따라 잘 보존함 예암의 휘장일세-穩藏依古禮庵輧’로 남아 있다. 25~38구까지는 차를 즐기는 대둔사 승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아 당대에 성대하게 퍼진 차문화의 실상을 증언했다. 중부(中孚, 草衣), 리봉(离峯), 무위(無爲), 예암(禮庵), 남파(南坡), 영호(靈湖), 제산(霽山), 언질(彦銍), 성학(聖學), 태연(太蓮) 등 10명의 이름이 보인다. 모두 초의 이후 그 법맥을 이은 제자들이다. 리봉이 초의를 이었고, 무위는 차의 조화(調和)를 법도에 맞게 끓여내는 데 특별한 역량이 있었다. 예암은 예전 방법대로 차를 잘 보관할 줄 알았다. 남파는 좋고 나쁜 정을 가리지 않고 차를 즐겼고, 영호는 많으면 많은 대로, 적으면 적은 대로 차와 늘 함께 하는 생활을 영위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승려들의 영향으로 세속의 인사 중 차를 즐기는 이들이 당송 제현들만큼이나 늘어났다고 했다. 제산은 차의 진미(眞味)를 즐길 줄 알았고, 언질이 납일에 따서 덖은 찻잎을 성학(聖學)이 끓여내어 태연(太蓮)을 불러 함께 마시는 성황을 이어서 노래했다. 차는 만병천수(萬病天愁) 즉 온갖 질병과 갖은 시름을 다 걷어가고, 성품에 따라 소요하게 만든다. 경탕(經湯), 곧 차를 끓이는 동안 기록을 하고 찬송을 한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면 유성 하나가 꼬리를 태우며 가없는 하늘가로 지나간다. 그저 두면 밤하늘에 잠시 명멸했던 별똥별처럼 스러질 이러한 기록들을 모두 꼼꼼히 적어서 길이 세상에 전하겠노라는 다짐으로 시를 마무리했다. 조선 후기 차 문화의 생생한 현장을 증언한 대단히 중요한 작품이다.

여기까지가 정민교수의 역(譯)이고 논(論)이다. 모두 차치하고 이들 승려들만 분석해도 아주 재미있는 승적(僧籍)들이 나온다. 더욱이 이들이 모두 편양파 승려들도 아니다. 이들 10명의 승려가 편양파와 소요파로 따로 나뉘지 않고 사이좋게 초의의 법맥을 잇고 있다. 남파 복율(南坡 伏律)은 소요파 문중으로 풍암의 제자다. 남파는 복율伏律)과 교율(敎律)로 법명이 두 개로 나타나는데 <불교종파계보(佛敎宗派系譜)>에서는 남파 복율(南坡 伏律)로 소요 문중으로 보인다. 그 계보를 정리하면 청허 휴정(淸虛 休靜)- 소요 태능(逍遙 太能)- 해운 경열(海運 敬悅), 취여 삼우(醉如 三愚)- 화악 문신(華嶽 文信)- 설봉 회정(雪峰 懷淨)- 송파 각훤(松坡 覺喧)- 정암 즉원(晶巖 卽圓)- 연파 혜장(蓮坡 惠藏)- 수룡 색성(袖龍 賾性)- 철선 혜즙(鐵船 惠楫)- 풍암 의례(豊庵 宜礼)- 남파 복율(南坡 伏律)이다. 팔굉 관홍(八紘 寬洪)과도 같다. 그래서 남파 복율과 팔굉 관홍(八紘 寬洪, 1824~1894)은 형제간이라는 기록이 보이는 것이다.

할아버지때 부터 내려오는 찻잔. 아버지는 종종 사용하셨다.본인은 아까워서 두고두고 보면서 선대 차인들을 기리고 있다고...
할아버지때 부터 내려오는 찻잔. 아버지는 종종 사용하셨다.본인은 아까워서 두고두고 보면서 선대 차인들을 기리고 있다고...

이 법계는 응송의 법계와 비교하면 풍암 의례(豊庵 宜礼)에서 갈라진다. 화월 서홍(化月 敍葒)- 혜암 보혜(惠菴 普惠)- 응송 영희(應松 暎熙)로 이어진다. 그런데 대둔사의 찻독이 편양파와 소요파로 분리되어 있어 초의와 응송을 이을 수 없다는 정민교수의 논지 <차의 세계> 8월호, 대둔사의 ‘찻독’이야기>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야말로 자가당착(自家撞着)이다.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는 정말 새로 써야 하는가?

* 다른 기록에서는 팔굉 관홍(八紘 寬弘, 1824~1894)으로 되어 있다. 해남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에 들어가 풍암 의례(豊庵 宜礼) 밑에서 교율(伏律)(남파를 이르는 다른 법명, 석일(碩一) 등과 함께 수도하다가 그의 법을 이었다.

아버지는 편양 언기 문중, 아들은 소요 태능 문중

고성주선생이 어렸을적 할아버지 때부터 썼던 탕관 아버지가 화롯불 위에서 물을 끓여 사용하셨다.
고성주선생이 어렸을적 할아버지 때부터 썼던 탕관 아버지가 화롯불 위에서 물을 끓여 사용하셨다.

예암 광준의 제자가 낭월(浪月)의 부(夫), 고성주선생의 조부이신 초우 상선(初雨 祥善)이다. 보련각에 할아버지 영정이 모셔져있다. 할아버지까지는 대흥사에 있고, 아버지는 종교개혁 때 나오셔서 영정각에 없다. 그런데 이들(초우 상선과 예암 광준)은 모두 편양 언기 문중이다. 할아버지의 법계는 청허 휴정(淸虛 休靜)- 편양 언기(鞭羊 彦機)- 풍담 의심(楓潭 義諶)- 월담 설제(月潭 雪霽)- 환성 지안(喚醒 志安)- 호암 체정(虎巖 體淨)- 연담 유일(蓮潭 有一)- 의암 창인(義庵 昌仁)- 은암 정호(銀庵 正浩)- 포운 응원(浦雲 應元)- 예암 광준(禮庵 廣俊)- 초우 상선(初雨 祥善), 그 다음이 청월 병권(淸月 炳權)이다. 이 전법게는 <불조종파계보(佛祖宗派系譜)>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아버지인 무영 재섭(無影 在燮)은 응송스님의 제자로 소요 태능 문중이었다. 부자(夫子)가 찻독이 달랐다. 이 10명의 승려들이 전부 편양 언기 문중도 아니다.

할아버지 초우스님. 탱화장이신 아버지가 그린 작품.
할아버지 초우스님. 탱화장이신 아버지가 그린 작품.

고성주 선생은, 할아버지(초우 상선)는 노화에서 태어나 5형제 중 가운데였는데 낳자마다 단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단명하면 출가해서 단명을 면할 수 있게 하라는 주위의 조언으로 홀홀(혈혈)단신 대흥사로 출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 결혼도 하였다. 그래서 할아버지대부터 대처승이었다. 대처승은 일제강점기 때부터 생긴 용어이다. 원래 태고종은 선맥이었다. 당시 승려들은 사찰 내에서 살지 않았다. 그래서 대흥사 주변에도 사하촌이 많았다. 재 넘어 현산과 재 넘어 북평, 북일 그 쪽에 전부 속가들이 있었다. 저녁에는 갔다가 새벽 예불 때 들어오곤 했다. 아버지는 천불전을 지키고 계셨다. 아버지가 전해주시는 이야기로나 저의 어릴 적 기억으로나 대흥사 도량 내에서 여자들은 없었다. 요사채에서도 스님들이 공양을 준비했다. 할아버지 속가는 현산 덕흥리에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들 셋을 두게 되는데 장남은 농사를 지어야 하니 속가에 남았고 둘째와 셋째가 대흥사로 출가했다. 입을 덜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무영 재섭스님은 막내였다. 둘째는 현산 쪽 암자로 나가셨고 무영 재섭스님만 할아버지 상좌를 하면서 대흥사에 꽤 오래 남아 있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에게 차라든가 범패라든가 탱화라든가 이런 것을 배우고 계승하게 되었다. 범패 같은 것도 아버지께서는 굉장히 잘 하셨다. 당시만 하더라도 범패하는 승려들이 없었다. 아버지하고 잘 맞던 분이 서길룡스님이라고 계셨는데 돌아가셨다. 그랬던 분인데 불교분쟁으로 절을 뺏기고 그때가 (19)61~62년으로 기억한다. 그 후 아버지는 응송스님과 함께 15년 정도를 법정 싸움을 했다. 대흥사를 찾기 위해서 그렇게 다툼을 했지만 사하촌에서 열반하셨다. 당시만 하더라도 아버지는 다시 대흥사로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이었던지 당신의 물건 하나를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응송스님의 법제자였다. 본인도 응송스님에게 수계를 받았다고 한다. 아버지 낭월은 탱화장이었고 그 전수자가 본인인데 아버지는 늘 탱화는 승려가 그려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왜냐? 승려의 눈으로 봐야 부처님의 탱화를 제대로 그리지 속인의 눈으로 탱화를 그린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작품은 탱화장 낭월스님이 16세때 그린 작품.
이작품은 탱화장 낭월스님이 16세때 그린 작품.

속인은 절대로 부처님의 현상을 보지 못한다 하셨다. 그래서 응송스님으로부터 수계를 받자마자 아버지는 손수 본인에게 염불하는 것을 가르쳤다. 새벽 예불제 모시는 법부터 불가의 예법을 직접 쓰셔서 손수 책을 엮어 주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승적까지 만들어 주었다. 삼 형제인데 장 형님은 양주에 둘째 형님은 삼산면 버섯동에 그리고 본인이 셋째이다.

어머니랑 해년마다 대흥사 제다법으로 차 만들어...

아버지 계실 때는 말할 것도 없이 식구들이 총동원해서 제다를 했다. 아버지는 차를 만드실 때 손에 장갑 같은 것을 일체 못 끼게 하셨다. 그것으로 인해 차 맛이 저해된다는 이유였다. 일부 대흥사에서는 대솔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가끔 나무 가지를 세 갈래로 깎아서 사용하기도 하고 몽땅 빗자루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거는 마지막 건조 단계에서 건조하고 솥에서 차를 들어 낼 때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맨손으로 하시는 것을 원칙으로 하셨다. 아주 뜨거울 때는 어쩔 수 없지만 손의 감각으로 덖을 때가 가장 좋다고 강조하셨다. 양 손으로 차에서 찻물이 나올 정도로 비벼 무쇠솥에 덖었다. 불 조절이 매우 중요한데 불이 세든 약하든 차가 타서는 절대 안 된다. 펴져 있던 찻잎을 오그라지게 하는 것이 기술이다.

예암스님 다례의식 하실 때부터 사용했던 다기. 지금은 고성주 선생이 예암증조 초우조부 낭월부 차례를 모실 때 쓰고 있다고 한다.
예암스님 다례의식 하실 때부터 사용했던 다기. 지금은 고성주 선생이 예암증조 초우조부 낭월부 차례를 모실 때 쓰고 있다고 한다.

어머니(현재 92세 1925년 을축생)는 작년(2015)까지 모시다가 내자가 광주로 발령 나서 어머니는 서울 형님 댁으로 가 계신다. 작년까지도 어머니랑 차를 만들어 마셨다. 지금도 또랑또랑 하신다. 올해는 본인이 내자랑 차를 만들어서 마시고 있다. 그렇게 제다법까지도 대물림을 하셨다. 그래서 예암스님 제사도 아버지가 모셨다. 절 승적(僧籍)으로 아버지는 예암스님을 조부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열반하시고 어머니가 혼자 계시면서는 합일하여 모시고 있다. 추석날 합동으로 형제간들이 어머니 모시고 같이 예를 올린다. 내자도 흔쾌히 좋다고 해서 지금까지 모시고 있다. 예암스님은 할아버지 은사님으로 본인으로서는 증조인데 모시자 하니 서로의 의견이 맞아 그렇게 하고 있다. 간소하더라도 정성으로 준비해서 또 본인이 염불을 아버지한테 배웠으니까 예를 다해 모시고 있다. 축원도 해 드리고 그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여 지켜 드리고 있다.

*필자의 단상

현장에서 입수한 불조종파 계보. 대둔사 승려들의 승적이 기록되어 있다.
현장에서 입수한 불조종파 계보. 대둔사 승려들의 승적이 기록되어 있다.

초의차의 제다법과 대둔사의 다풍을 천착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현장조사는 이렇게 마무리 하겠다. 초의차가 전승되어 온 공간적 의미로서 대흥사는 매우 중요한 단서였다. 초의 당시의 과거를 고증하는 통로였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크게 9명의 구술자를 만났다. 박동춘, 임정예, 임경수, 경현스님, 박보살, 이화중스님의 가족들, 광호엄마, 김두만 선생님의 2남과 며느리, 낭월스님의 3남까지 물론 장춘동의 박보살, 동다송을 번역한 김두만 선생님의 2남, 우주엄마(응송스님 며느리)가 백화사에 들어가기 전에 응송스님을 모셨던 상좌의 내자 광호엄마의 구술이 남아 있지만 대부분 제다법의 대한 이야기이기에 제다법을 정리할 때 한 사람 한 사람 제다법을 정리하여 소개하겠다. 이후 나가게 될 제다법에 대한 글도 많은 관심 부탁드린다. 초의차의 다풍 연구의 일환으로 대흥사와 주변 인물들의 현장조사는 필자에게 많은 이야기와 정보를 내 주셨다. 초의차의 실상을 그대로 볼 수 있는 고증이었다. 정말 설레는 마음으로 발품을 팔았다. 인터뷰에 응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고 차와 함께 여여한 생활 그리고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기를 희망한다. 다시 현장에 나설 때는 필자가 찻자리를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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