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시고 있는 응송스님.
차를 마시고 있는 응송스님.

한국의 근현대차문화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것은 그간 차 관련 학문적 성과에 대한 진전이 없기 때문이다. 자료의 부족, 연구부족의 결과이다. 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연구결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이른바 정황추측만으로 잘못된 사실을 이른바 ‘당위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근현대차문화의 역사뿐만 아니라 과거의 차 문화 역사 역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사실에 입각한 연구결과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향후 차문화복원에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보여진다. 본 기사는 미디어붓다에 실린 정서경 박사의 <한국 근. 현대 차 문화 전승의 줄기를 캐다>란 두 번째 기고문이다. 본 기사에 실린 사진의 저작권은 정서경박사에게 있으므로 무단 전재를 금합니다. 본지는 정서경 박사의 기고문에 대한 반론에 대해서도 게재할 방침이다. 독자제현의 많은 관심이 있기를 기대한다.<편집자주>

응송스님(應松 暎熙, 1892 용띠~1990)은 대처승으로 슬하에 자녀가 없었다. 그래서 집안 5촌 동생의 3남 1녀 중 큰아들 박정부(朴正夫, 1941 뱀띠~2013)씨를 양자로 들였다. 당시 해남 삼산국민학교 교사였던 박정부와 임경수(林京洙, 1946~ 71세 개띠)씨는 1969년 4월 초에 결혼을 했다. 당시 응송스님은 정장을 차려 입고 결혼식에 참석해 본인의 의사를 밝혔고, 1년 채 못 되게 친가에서 살다가 1970년 박정부 부부는 백화사로 들어가 응송스님과 함께 생활했다.

1990년 응송스님이 열반할 때까지 소위 아버님으로 응송스님을 모셨다. 백화사로 들어갈 당시에는 이미 사모님(응송스님의 부인 이호경 여사의 며느리 호칭)은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결혼할 당시 응송스님은 그런 뜻(양자를 들일 생각)이 있으셨는지 결혼식에 예를 갖추고 오셔서 식을 마치고 나니 친가 부모님께 당신의 의사를 비치셨다 한다. 며느리는 응송스님을 딱 21년 동안 모셨다. 70년에 들어가 90년 열반 하실 때까지 모셨으니 스님의 모든 생활을 일거수일투족 다 기억하고 있다. 21년 동안 차철이면 늘 차를 같이 땄고 같이 만들었다. 거의 집을 비우지 않았다. 독실한 불자인 며느리는 본인의 생활은 거의 없이 며느리의 역할을 가장 중요한 자신의 소임이라고 생각하고 응송스님을 모셨다. 더욱이 차철이면 스님의 시봉자였던 임정예(林正禮, 1963~ 54세 토끼띠)와 셋이 차를 만들었다.

응송스님의 양자 박정부 임경수 결혼사진. 신랑쪽 뒷쪽 정장차림이 응송스님.
응송스님의 양자 박정부 임경수 결혼사진. 신랑쪽 뒷쪽 정장차림이 응송스님.

"스님과 시봉했던 정예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차 만들었어요. 동춘이 오기 전까지이후 스님 열반하실 때까지 차를 배운 제자는 동춘이 뿐이고, 어떤 비구도 비구니도 차를 같이 만든 적은 분명코 없습니다."

임경수씨의 구술조사이다. 인터뷰를 채록한 것이다.

"그리고는 79년도에 동춘이가 들어와서 차는 4명이서 만들고 차잎을 조금 많이 딸 때는 이웃 아주머니들이 비벼주기도 했다. 21년 동안 차 만드는 일을 한 번도 걸러 본 적이 없다. 스님은 일단 차를 딸 때도 아주 세밀하게 땄다. 찻잎도 어디서 따느냐가 제일 문제였다. 그런데 차잎이 혹시 마를까봐 천으로 덮어놓았다. 4명이 셋트가 되어 차를 만들 때면 손발이 아주 잘 맞았다. 동춘이가 와서부터는 덖는 일은 스님과 같이 했다. 동춘이가 처음에 와서 불을 볼 때도 있었는데 정말 귀신 같이 불조절을 잘 했다."

응송스님의 제다 과정을 전체를 재현하면서 며느리는 회고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불 조절이 엄청 어렵거든요. 그런데 처음에 동춘이가 와서 이것을 아주 참 잘 하드라고요. 처음에는 뭐 동춘이가 바로 했겠어요? 이제 불 조절하면서 인제 자기도 터득을 해 가는 과정이었겠죠. 그런데 처음 하는데 아주 잘 했어요.”

찻일을 하기 위해 찬찬히 준비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했다. 스님은 하나하나 일러 주시고 가르쳐 주셨다. 좋은 차를 덖기 위해 노장의 연세에도 손수 덖기도 하고 늘 차 만드는 일을 함께 했다. 매번 덖고 비빌 때마다 “그래 이 정도면 되았다. 아니다 아직 멀었다. 더 해야 쓰겄다”등 조금이라도 맘에 안 드시면 다시 하기를 종용했다. “뭐 요즘 말로 뭐라하드라마는 뭐 증차 뭐 그런 차를 우리 노스님이 만들었다고 그런다 하드마는 스님은 한 번도 그런 차를 만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 노스님은 덖음차라고 하셨어요."

찻잎을 따서 들고 있는 응송스님
찻잎을 따서 들고 있는 응송스님

차는 많지도 않았다. 극히 소량이었다. 그때는 찻잎을 참 멀리도 따러 다녔다. 동춘이가 오기 전 백화사에 노스님이 심은 차나무가 있었지만 채다할 정도는 아니었다. 대흥사에도 찻잎이 있기는 했을 텐데 그때는 대흥사꺼 우리가 함부로 딸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고 당시에는 우리가 대흥사에서 참말로 숨도 크게 못 쉬고 살았다. 정말 죄인 아닌 죄인으로 그렇게 살았다. 백화사에서 산다는 죄로 조금만 일로 우리를 걸고넘어지고 하는 통에 참 힘들었다. 내가 모시는 동안은 스님은 마지막까지 그렇게 해년마다 1년 농사라며 당신의 양식을 만들었다. 24살에 시집가서 25에 백화사에 들어갔다. 동춘이는 5년 넘게 같이 거주하고 올라갔다가 왔다 갔다 한 기간이 매우 길었다. 광주로 이주하고도 차철이면 내려와서 우리랑 같이 차를 만들었다. 동춘이는 응송스님에게 아주 공부를 찬찬히 배웠다. 머리도 좋고 공부를 아주 열심히 했다. 항간에는 모 비구니스님이 응송스님의 제자라 주장한다는 말을 들었는데 한 번도 스님과 차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백화사의 부엌이 뻔하지만 차를 여러 사람이 만들 수 있는 환경이 아닐뿐더러 당시의 백화사가 누구를 유숙하게 하거나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못 되었다.

백화사의 응송스님과 제자 박동춘
백화사의 응송스님과 제자 박동춘

“내 기억으로는 2번 정도 본 기억이 있어요. 그런데 그분이 스님한테 와서 차를 배우고 했다는 거에요? 우리 노스님한테 차를 배운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분명코 없습니다. 차를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어요. 차를 덖어보거나 불을 조절해 보거나 그래 본 적은 한 번도 없어요. 어느 시기에 왔었는지? 아니 누가 오라 해서 오든 안 해요. 그때가. 그때는 전화도 없으니까 전화를 해서 오라하고 안 하고 뭐 그런 것도 못 했죠. 그런데 어떻게 댕기시다 오셨나! 저희는 주무실 곳이 없어요, 사실 어떻게 오시게 돼서 한두 번 뵌 적은 있어요. 제 기억으로는 오후에 와서 가신 것으로 기억해요. 주무시거나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분이 우리 노스님한테 차를 배웠다 하고 차를 쪄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응송스님이 차를 쪄서 만든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그 분이 응송스님에게 차를 배운 것을 본 적도 없습니다. 우리 노스님은 이 차는 덖음차라고 하셨는디 또 작설차라고 하시기도 하고, 동춘이는 우리 애들하고 같이 방을 썼어요. 그런데 이것이 참 재미있는 일이네요.”

“그런데 우리 노스님에게는 동춘이가 아주 찬찬히 배웠어요. 특히 차는 동춘이 밖에 없었어요. 동춘이는 스님하고 쭈욱 있으면서 이론적으로나 이런 것으로나 아주 스님한테 제대로 배웠거든요. 공부를 아주 찬찬히 했는데 그분은 스님한테 와서 차 한 두 번 마신 적 밖에 없어요.그 분이 차만 마셨지 차를 만들어 보기를 했나? 차를 따 보기를 했나? 차를 비벼 보기를 했나?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백화사에서 생활하실 때 인근에서도 차를 손수 만들어 드신 분들은 없었느냐는 질문에 내(며느리)가 백화사에 있을 때 차 만든다고 했던 다른 스님은 없었다. 그랬다면 혹시라도 우리 노스님이 말씀 하셨을 건데. 대흥사에도 차를 만드는 분은 없었다. 강진 금곡사에 가면 똘로 연결된 냇갓이 있는데 거기 가면 이쪽 저쪽에 차가 있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차를 땄다. 진도는 조그만 절이 있었는데 그 절 위에서 차를 땄다. 그런데 그 절 이름이 잘 생각이 안 난다. 우리 선생님(박정부)은 기억 할건디, 절에 스님도 안 계셨다. 차 따러 가서 절에서 잠을 잔 적도 있었다. 애들 아빠랑 같이 가서 땄다. 진도는 밭 사이에도 차가 좀 있고 그랬다. 동춘이는 백화사를 떠나서도 차철에는 항상 와서 차를 만들었다. 극락암으로 스님이 가실 때는 우주가 5학년(현재(2016) 우주가 1974년생 43세) 때 갔다. 우주를 엄청 예뻐하셔서 늘 나를 부를 때는 우주엄마야 그렇게 불렀다. 아이 셋을 다 백화사에서 낳았다.

“스님은 참 자상하셨어요. 며느리 옷 해 입으라고 천을 떠 오시기도 하고 , 어디 출타 하셔서 바나나를 하나 얻게 되거나 하면 그것을 드셔야 하는데 우리 먹인다고 가방에 들고 오시면 여기(백화사) 오시면 다 죽 되 버리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보시며 그렇게 아쉬워하시고, 저는 스님 생전에 늘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전생에 스님이 내 친정아버지셨을까? 아니면 내가 스님의 독실한 불자였을까? 한 번도 제게 눈을 부라리거나 화 한 번을 내 보시지 않았아요. 저는 그것이 지금도 가슴 아파요.”

응송스님과 손님과 며느리
응송스님과 손님과 며느리

응송스님 열반에 드시다.

“열반 하실 때는 새벽 4시쯤 위가 아프다고 으엉으엉 하는 소리가 나드라구요. 그때는 우리가 극락암에서 가까운 주택에서 살 때인데, 스님이 절을 왔다 갔다 하셨어요. 절에는 도의 비구니스님이 계시고 해서 스님이 큰방 쓰시고 우리들이 방 하나 또 아이들이 방 하나 그렇게 쓰고 살았어요. 큰 방하고 작은 방하고 좀 떨어져 있어요, 그런데 인자 스님이 차는 항상 끓여 드시거든요. 그 방에는 포트도 있고 해서 차를 드시고는 그날 밤이 새고 새벽 4시 됐어요. 이상한 소리가 나서 나가봤더니 화장실에서 나오시다가 주저앉아 계시는 거에요. 깜짝 놀라서 왜 그러시냐고 괜찮으시냐고 물었더니 “아야 여가 이렇게 아퍼서 못 일어나것어야” 하시더라구요. 그래서 병원으로 옮기시고 엑스레이 찍고 수술 받고 하셨는데 병원에 한 달 동안 계셨어요. 그래가지고 위가 파열 되서 병원에 입원해 계셨는데 병원에서 자꾸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자 하시더니 설은 집에서 쇠시자고, 초하루가 스님 생신인데 딱 열흘 더 계시고 열반하셨어요. 극락암에서 다비식을 했지요. 아주 잠깐 사이에 그렇게 가셨어요.“

극락암에서는 백화사에서 올라와 딱 1년 정도 요사채에서 살았다. 그리고 우리는 주택을 사서 나오고 스님은 왕래 하시면서 차철에는 극락암에서 차를 만들었다.

“백화사에서는 우주 5학년 때 올라 왔어요. 그런데 극락암에서 우리가 1년 살고 주택에서 5년째 살던 해 열반하셨어요. 우주가 고등학생 때였어요. 스님께서 우리 우주 대학에 들어가는 거 보고 가야 하는데 하는 말씀을 하셨어요. 우주를 참 예뻐하셨어요. 정말 자상하셨어요. 우리를 양자로 들인 이유도 당신 걱정이 아니라 사모님 걱정 때문에 그러셨다 하셨어요. 당신은 절에서 다 알아서 할 것이고 "그러니 나는 열반 후에도 나는 아무 신경 쓰지 마라. 나는 승려다. 그러니 제사밥을 얻어 먹어도 절에서 얻어먹을거다. 그러니 너희는 어머니 기일 잘 모셔라"고 늘 하셨어요. 그래서 지금도 사모님 기일은 내가 모시고 있어요.”

앨범을 보며 당시를 회상하는 며느리.
앨범을 보며 당시를 회상하는 며느리.

백화사를 떠나면서 백화사에 매년 사모님 기일을 부탁했다가 지금은 며느리가 직접 모시고 있다고 했다. 그냥 제 정성껏 성의껏 모시고 있다고 그러면서 사모님 영정 사진을 내 보인다.

“사모님은 내가 시집가서 백화사에 들어갔는데 안 계셔서 물었더니 돌아가신지 4년인가 5년인가 되셨다고 하셨어요. 70년에 백화사에 들어갈 당시에”

지금도 꼭 차를 우려 올린다는 며느리
지금도 꼭 차를 우려 올린다는 며느리

우리 노스님은 흰 찰밥을 참 좋아하셨어요. 스님은 생전에 흰 찰밥을 매우 좋아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늘 찰밥을 지어 올리고 과자는 00000를 좋아하셔서 아이들이 꼭 슈퍼에 가면 00000를 사서 올리고 하신단다. 매년 동춘이가 차 한 통을 보내와 스님 영전에 올리고, 또 차를 우려 올려 드리는 일이 현재로서는 며느리가 할 일이라고 정성을 다 한단다. 어찌나 정이 많으신 분이었는지 올해로 열반 26주기가 되었지만 많은 회상을 하게 된다고. 며칠 있다가 중국에 있는 우주가 불러서 출국할 계획이라고 한다. 한 달 정도 있다가 귀국할 예정이라고 해서 귀국하시거든 저랑(필자) 하루 정도 시간 내서 데이트 하시자고 했다. 응송스님이 좋아하시는 흰 찰밥만 좀 준비해 주시라고 저는 00000 준비하고 차 한 잔 올려 드릴 준비물 챙기겠노라고. . .

손자손녀들이 있어 고민하다.이렇게 응송스님과 사랑양반을 기리고 있다.
손자손녀들이 있어 고민하다.이렇게 응송스님과 사랑양반을 기리고 있다.

응송스님 며느리와의 만남은 4번(지난 7월 13일 수요일, 7월 16일 토요일, 9월 1일 목요일, 9월 6일 화요일) 당신이 다니시는 절에서 첫 번째 인터뷰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사진을 받기 위해 두 번째 만남은 댁으로 찾아갔다. 세 번째는 중국에 한 달여 아들에게 다녀 온 다음에 이루어졌고, 네 번째는 광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나 댁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필자가 채록하는 과정에서 궁금하거나 또 잘못 들은 대목은 통화를 하면서 진행되었다. 며느리를 만나기 전 당시의 백화사와 극락암의 주변 인물들에게 며느리에 대한 성정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극진히 스님을 봉양했던 며느리는 현재도 정성을 다해 차를 우려 스님께 올리고 있었다. 부드럽고 차분한 당신의 모습에서 참 인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평생을 본인의 삶을 살아보지 못한 당신은 지금도 아이들과 손자 손녀들을 위한 삶을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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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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