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현대차문화는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그것은 그간 차 관련 학문적 성과에 대한 진전이 없기 때문이다. 자료의 부족, 연구부족의 결과이다. 또 한 가지 어려운 점은 정확한 사실에 입각한 연구결과를 보여주지 못하고 이른바 정황추측만으로 잘못된 사실을 이른바 ‘당위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근현대차문화의 역사뿐만 아니라 과거의 차 문화 역사 역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최근 들어 사실에 입각한 연구결과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향후 차문화복원에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보여진다. 본 기사는 미디어붓다에 실린 정서경 박사의 <한국 근. 현대 차 문화 전승의 줄기를 캐다>는 기고문 이다. 본지는 정서경 박사의 기고문에 대한 반론에 대해서도 게재할 방침이다. 독자제현의 많은 관심이 있기를 기대한다.

                                                                <편집자주>

초의열반추모기념학술세미나 ‘초의차 전승맥락’논문 의뢰받음

검박하게 차를 마시는 응송스님.
검박하게 차를 마시는 응송스님.

올해로 초의 열반 150주기를 맞이했다. 그래서“2016 초의열반추모기념학술세미나가 10월 초 예술의전당에서 있을 예정이다. 필자는 이 학술세미나에서‘초의 차의 전승맥락’을 규명하는 논문발표를 의뢰받았다. 최근 무형문화재 지정건과 관련하여 초두의 관심사이기도 하고 차계에서 크게 이슈화가 되었던 문제이기 때문에 매우 까다로운 주제일 수 있다. 그러나 연구자이기 때문에 초의 차의 전승에 관한 현장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들여다보고 싶었다. 한국 차의 전승의 현장‘해남’을 위시하여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다. 해남과 진주를 오가며 조사한지도 벌써 10년이 넘었다.

매듭으로만 존재한 채 풀리지 않은 이 문제를 명징하게 규명하고 싶은 일념으로 논문을 정리하고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초의 의순(草衣 意恂, 1786~1866)의 다풍은 우리나라 차의 원형으로 차 문화의 정수와 그 기준을 제시하고 있으며 차살이의 깊은 이치를 담고 있기 때문에 생성 이후 우리의 차문화권에서는 가장 근원적인 다풍으로 존숭되어 왔다. 또 그가 남긴 『다신전』은 조주풍의 다풍을 사원이나 차를 알지 못하는 몽매한 자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의도와 취지를 통해 우리차의 정체성이라는 주장이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그러면 초의 차의 원형과 학문적 의의가 무엇이고, 다풍 전승의 본질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여 필자는 초의 차의 전승맥락을 고찰하고자 방학을 이용하여 종횡무진 차 문화의 현장을 누비고 있다. 전통차의 복원이라는 숙제는 아직도 차계의 매듭으로 남아 있다.

우리 전통차는 초의차에서 그 연원을 찾아야 한다. 초의차는 우리차의 근간이며 한국차가 지속적인 차의 기능으로 전승되어 온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면 초의 차의 원형이 아직도 명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니 초의 차의 인식문제와 정체성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 할 수 있다. 이것은 차의 생산과 가공을 담당하는 생산자단체, 차의 음다와 향유층을 점유하는 차인단체, 차의 과학과 차 문화를 연구하는 학자층 모두가 책임져야 할 미션이며 급선무다. 한국 차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중론이 대두되고 있는 중차대한 시점에서 차문화계 바운더리에 모든 구성원들의 각성이 필요할 때다.

응송스님 10년 차 시봉 임정예씨 만나다

그래서 필자는 이런 문제점을 바탕에 두고 한국 차의 원형이며 우리 차 문화 전승의 원론이라고 할 수 있는 초의 차의 전승맥락을 세부적으로 검토해 보고 있다. 우선 역사기록 자료인 문헌연구검토와 기억장치를 통한 구술연구를 병행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응송스님(應松 暎熙, 1892~1990)의 조카와 며느리, 그리고 10년을 넘게 시봉했던 임정예씨를 만나게 되었다. 무엇보다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는 문제이고, 학계 민감한 부분을 다루고 있는 점을 고려해 각종 사료와 방법론 모색, 현장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매진하다보니 이런 현장성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초의 차의 원형과 전승맥락에 대한 긴 논쟁의 정점에서 한국 근․현대 차 문화 전승의 한 줄기를 캘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선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있었던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실마리이고, 아직 풀리지 않은 한국 전통차의 매듭을 풀 수 있다는 현장과 고증의 덕이다. 연일 호남지방은 장마전선이 이어지고 있어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우선 임정예씨부터 만나기로 했다. 지난 7월 13일 수요일이다. 그녀는 불교와의 인연은 시집을 가기 전으로 접고, 시골의 작은 교회에서 권사로 일하면서 교회 노인신도들의 점심식사를 돕고 있었다. 그저 수더분한 모습이지만 아주 어릴 적부터 노스님을 모신 까닭에 야무지고 강단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필자를 반겨 주었다.

말년까지 손수 채다를 해서 제다를 했던 응송스님.
말년까지 손수 채다를 해서 제다를 했던 응송스님.

그녀의 이름은 임정예(1963년생, 54세 토끼띠), 언제부터 응송스님을 모셨냐는 질문에 국민학교 5학년 때(당시 나이 11세), 1975년경으로 추정된다. 그것은 응송스님의 양자인 박정부씨(朴正夫, 1941 뱀띠~2013)가 국민학교 교사였기 때문에(4학년을 마치고 가사를 돕고 있는 형편이라) 학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를 형부라고 불렀다. 임정예씨는 응송스님의 며느리인 임경수씨(1946 개띠~ )의 사촌동생이다. 녹록치 않은 가정형편이라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이다. 응송스님의 시봉노릇을 하면서 가난을 이기고 학업을 병행할 수 있다는 기대였다. 사촌오빠 임한주(응송스님의 며느리인 임경수의 남동생)가 적극 권유를 했다. 그리고 나를 백화사로 직접 데리고 갔다.

백화사에서 놀고 있는 임정예씨와 응송스님 손자들.
백화사에서 놀고 있는 임정예씨와 응송스님 손자들.

몇 년을 응송의 시봉을 하다가 박정부가 6학년 담임을 맡게 되자 학교를 다니면서 그 일을 계속 했다. 그렇게 국민학교 졸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니 때를 놓친 학업이 늦어지고 일과 학업을 병행한 관계로 성숙한 나이에 겨우 졸업만 마쳤다. 그러고도 10년 넘게 백화사의 생활은 계속되었다. 응송스님이 광주 쌍촌동 소재의 극락암으로 가시기 전까지 시봉역을 맡았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절에 들어가 주로 하는 일은 스님의 심부름, 그리고 스님의 손자들과 같이 놀아 주는 일이었다고 한다. 주로 스님 방 청소와 손톱을 깎아드리거나 안마 같은 허드렛일이었다. 가끔 스님 머리를 삭발하는 일도 했고 부엌일을 돕기도 하였다. 언니(응송의 며느리)가 없을 때는 스님 공양을 올리는 일도 몫이었다. 밥을 못해서 까맣게 태우기도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런데 차 끓여 들이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박동춘 선생이 오기 전까지 그리고 박선생님이 서울로 일 보러 갔을 때도 그녀의 몫이었다. 제다 철에는 차 만드는 일도 그녀의 일 중 하나였다. 주로 비비는 일을 했는데, 가끔 불을 볼 때도 있었다. 하지만 유념은 거의 본인이 했다. 최근에는 어떻게 어떻게 연결이 되어서 박동춘 선생(1953~, 용띠)이 제다철에 주암에 오면 제다 일을 돕기도 했다.

응송스님과 10년넘게 차를 만든었던 임정예씨.
응송스님과 10년넘게 차를 만든었던 임정예씨.

“주암에서는 인근의 할머니들을 놉 얻어서 제다를 하는데 처음 해보는 이들은 빨래하듯이 하고 있어서 내가 유념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차가 다 부스러지니 내가 하는 방식대로 따라 해 보라했다. 내가 하는 방식은 너무 힘이 든다. 그리고 언능(빨리, 손쉽게) 안 된다. 팔목도 아프고 그래서 사람들이 내가 말한 방식으로 안 하고 그냥 편한대로 해서 그것을 고치는데 조금 애먹었다. (스님은 대바구니에서 하는데 솥에서 차를 덖어 내주면 차를 한주먹씩 쥐고 공굴리듯이 차를 비볐다. 스님은 세게 비비지 말고 차를 부스러지지 않게 부드럽게 비비라고 늘 꾸짖었다.) 그래서 가르친대로 안 하면 차맛도 안 좋고, 부스러지고, 차잎의 모양도 안 좋고 가루가 많이 생겨 바구니 씻을 때도 불편하다고 하니 나중에는 조금씩 고쳐졌다.”

"응송스님 한번도 쪄서 차를 만든적이 없다"

그 방식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손안에서 차잎이 부스러지지 않도록 비비는 것이다”라면서 손 모양을 취하는데 한주먹이 되는 차잎을 손 안에서 굴리며 비비는 형태였다. 차잎들이 서로 부딪히게 하는 것이 관건이라고 했다. 바구니가 많지 않아서 발 같은 돗자리에서 비비기도 했다. “그리고 건조시킬 때는 한지를 깔고 스님이 정갈하게 하는 것을 매우 강조했다.”스님의 제다법은 지금 박동춘선생이 하는 방식 그대로다. 응송의 제다법이 증제차가 아니냐는 질문에는“전혀 아니다. 스님은 한번도 쪄서 차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항간에 응송이 떡차를 만들기도 하였다고 야기되고 있어 질문을 했더니 “떡차 같은 것은 홍차잖아요?” 하면서 “그런 차는 만들어본 적이 없고 녹차만 만들었다. 그때는 인자 녹차라고도 안 하고 작설차라고 했다. 박동춘선생은 스님과 논문 쓰면서 와서 몇 년을 같이 보내고 올라갔는데 이후에는 왕래가 빈번하게 있었고 매년 제다철이 되면 내려와서 차를 만들었다”고 전했다. 스님께서 광주 극락암으로 올라갔을 때도 본인은 같이 차를 만들었는데 극락암에서 차 만들 때도 박동춘선생이 내왕했다. 그러고 나서 본인이 결혼과 함께 스님을 떠나게 되자 박동춘선생은 보지 못했다. 그런데 다시 연결이 돼서 지금은 주암에서 박동춘이 차를 만들면 도와주고 있다. 응송의 첫 제자라고 하는 원표스님 비구니의 이름을 들어본 적 있냐는 물음에는 한 번도 들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다고 말한다.

“여기저기서 손님들이 굉장히 많이 왔었는데 같이 생활하거나 차를 배운다거나 공부를 한다거나 하는 사람은 없었다. 스님이 워낙 좋으시니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셨다. 당일치기로 왔다 간 사람은 매우 많았다.”고 회고한다.“차를 만들 때는 항상 언니랑 스님이랑 셋이 같이 만들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논문 정리한다고 박동춘선생이 와서 가담하게 되었다.” 차를 만든 제자 말고 공부한다고 온 제자는 없었느냐는 질문에는 “박동춘선생 말고 한 여자분이 왔다가 공부하지 못하고 갔다. 성깔이 보통은 아니었다. 아마 시골 오지이고, 또 뭔가 뜻이 맞지 않았는지 그런 이유가 있을 것 같다”고 했다. “박동춘선생은 스님과 사이가 아주 좋았고 스님 역시 공부하는 자세가 되어 있다고 아끼셨다.”는 말을 강하게 피력했다.

“스님은 성격이 너무 자상하셔서 나랑 같이 하는 시간에도 아주 많은 이야기를 해 주셨고 또 재미있었다. 이야기는 주로 차 이야기, 또 스님이 살아온 이야기, 또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가르침 이런 것들이었다. 엄청 부모님같이 잘 해 주셨다. 자상하기 말할 수 없었다. 내가 백화사에 오래 있었던 것도 스님 때문이었다. 스님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오랜 시간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한번 장래를 걱정하여 나오려고 했는데 스님이 많이 붙잡아서 또 머물게 되고 그런 적도 있었다. 그런데 박동춘선생이 오고 백화사 생활이 더 좋았다. 아무래도 남의 식구로 있다가 동지애 같은 것을 느꼈는지 모르지만 선생님이라고 부르면서 잘 따랐다. 나중에는 사촌 언니보다 박동춘선생과 더 친해져서 생활했다. 장래를 생각하면 일찍 나와야 했는데 스님 말벗이 자기뿐이어서 그런 것도 매우 걸려 오래 있게 되었다. 또 이야기 할 사람은 저밖에 없잖아요? 누가 다정하게 하루 종일 말벗 해주는 사람은 없잖아요? 내가 그니까 항시 말벗 해주고 또 저녁에 식사 끝나면 또 말벗 해주고, 밤이 되어 자는 시간 외에는 거의 스님과 같이 지냈기 때문에 스님의 말년을 거의 기억한다.”

응송스님과 백화사에서 차를 만들다

손님들이 잦았다. 그러나 누구를 거하게 하거나 하룻밤을 유하게 하는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에 오래 동거하기는 박동춘선생 뿐이었다. 언니네 아이들이랑 생활해서 불편했을 텐데도 오랫동안 스님의 유발상좌 노릇을 했다. 손님이 올 때마다 차를 끓이는 일은 본인의 몫이었다. 수많은 차 손님들이 있었지만 차를 만드는 데 동참한 사람은 없었다. 머무를 공간도 없었기 때문에 당일치기로 그날 왔다 그날 가는 손님이 대다수였다. 본인은 차 만드는 방이 있었는데 그 방을 썼다. 박동춘선생보다 백화사에 먼저 들어갔고 사촌언니랑 같이 살면서 차 만드는 일을 배우고 거들고 차 끓여 들이는 일과 손님들이 오면 다동 역할을 도맡아 했던 것이 어찌 보면 생의 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응송스님이 극락암으로 가실 때 따라갔냐는 질문에는 “그렇지 않고 그때 본인은 다른 곳으로 생활의 터전을 옮겼다가 백화사로 스님 뵈러 갔는데 갑자기 광주 극락암으로 가셨다고 하길래, 해남 시누이 집에서 하룻밤 자고 광주로 올라갔더니 마치 차철이라 차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당시 광주 극락암에는 도의라는 비구니스님이 있었다. 그때 박동춘선생도 제다를 같이 했다. 그래서 백화사 동지들이 다시 만나 차를 만들게 되었다고 했다. 광주 절의 도의 스님은 차를 만드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스님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스님이 아프실 때도 옛날 잘 해 주시던 생각으로, 시집와서도 스님 곁에 좀 머물기도 했다. 그때는 광주 절에는 도의 스님도 계시고 해서 절 옆(쌍촌동)에서 자부하고 같이 살 때다. 절하고 댁을 왔다 갔다 하실 때인데 차철에는 절에서 제다를 했다”한다. “그럼 박동춘선생님과는 어찌 어찌 해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그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주암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제다 현장을 보기 위해 왔었다. 그래서 나는 그 현장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는다. 우선 차를 조용히 만들 수가 없었다. 한국 사람은 고사하고 외국 사람들도 소문으로 또는 어떤 인연으로 또는 조사 건으로 와서 정신없게 해서 참 애 먹었다. 이 찾아오시는 사람들의 끼니 대접에서부터 걱정도 많고 또 일일이 응대하는 일도 힘들어서 백화사에서 언니랑 또 박동춘선생이랑 차 만들던 그 때가 많이 생각났다.”

“그러면 원표스님은 차철에 응송스님을 찾아가서 차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전혀 기억이 없으십니까” “저는 한 번도 못 봤어요. 아마 나 없을 때 왔으까? 그럼 그 언니가 알건데? “언니라고 하면 박동춘선생님이요?”

“아니요 그 사촌언니(응송스님 며느리)가. 그 사신분이. . ”

“그니까 그런데 며느리는 또 원표스님이 안다고 하시든데. 그럼 박동춘 선생님이 백화사에서 나오실 때까지는 선생님이 백화사에 계셨지요?

박동춘씨와 함께 응송스님 차를 재건하고 있는 임정예씨.
박동춘씨와 함께 응송스님 차를 재건하고 있는 임정예씨.

“그랬죠! 인자 박선생님이 결혼하고 애 낳고 그러느라 한동안은 뜸 했어요. 그런데 인자 애기가 앞으로 차고 다닐 정도 되니까 운천사 그 차 만드는 현장에는 오시고 그랬었거든요. 그때 자기 남편(이철규씨)하고 같이 오셔가지고 만나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 후로는 저도 결혼해서 나와 버리고 그래서 통 못 만나게 된 거죠.

“그럼 박선생님 주암 차밭에서 차 도운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그것도 지금 10년도 넘었죠. 우리 애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도왔으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 애들은 다 커니 밥벌이를 하는데요. 그러니까 그것도 아주 오래 되었죠.

“그럼 박동춘 선생님과는 어떻게 다시 연락하게 되었어요.”

“그때 언니네 큰아들 여울 때 광주서 만났어요. 우현이 장가갈 때 거기서 만나갔고 얘기를 한 거예요. 자기가 여기서 차를 만들고 있다고. 그런데 놀러 오라고 하니까 장소를 가르쳐주니까 내가 찾아간 거죠. 그때 안 갔으면 못 만났겠죠? 아마. 연락도 안 되고, 전혀 전화번호도 없었고, 그때는 정말 반가웠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는 정말 너무 열악했어요. 막 질서가 없고 이거는 완전히 그래갖고 막 내가 몇 년 다니면서 유념하는 것도 가르치고 그랬죠. 그때 또 배용준 영화배우 왔을 때도 내가 거의 일을 많이 도와드렸죠. 그리고 배우러 오신 분들도 엉망이었어요. 솥 닦는 행주도 막 비누로 빨고, 막 세제로 빨고, 그 행주는 그렇게 빨면 안 되거든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그냥 빨아야 하는데 그런 것도 모르고 그래서 내가 다 가르쳤죠! 솥 안의 찌꺼기를 훔치는 행주는 또 따로 써야 하고, 그런데 박선생님 일을 도우면서 책임자가 없어노니 막 그런거도 구분도 없고 그랬어요. 그 당시에는 아무리 제자라 해도 1년 와서 슬렁 하고 가불고 또 슬렁 하고 가불고 그러니 참 어려웠어요. 또 막상 제다는 설렁설렁하고 글씨 쓰고 막 들여다보고 이래노니 그런 것에만 신경 쓰고 있으니 참 어수선했어요. 그런데 찻잎을 따오면 저는 그냥 제가 알아서 이래저래 손을 넣고 박선생님이 뭐가 필요한지 다 아니까 거의 손발이 맞았고 많이 도와드렸죠. 그런데 나중에는 솥이 밖으로 나오고 그래서 박선생님이랑 서로 번갈아가면서 손 넣고 하면서 재건를 했죠.”

그러면서 그녀는 아주 수줍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데 TV에서나 다른 분들이 제다하는 모습이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우리하고 같은 방법으로 하는 데는 한군데도 없더라구요. 아무리 봐도 없어요 없어. 우리가 제일 잘 만드는 거 같애. 하하하 너무 죄송한 말인데 우리가 차 만드는 것이 진짜같애. 하하 진짜 환경도 좋고 우리가 하는 과정은 진짜 힘든 과정이에요. 진짜 하나부터 열까지 그니까 우리가 자부심을 갖고 하는 거예요. 한번 할 때마다.”

그녀와의 만남은 2번(지난 7월 16일 수요일, 8월 19일 토요일) 그녀의 일터에서 틈을 내 인터뷰가 진행되었고, 필자가 녹음을 채록하는 과정에서 궁금하거나 또 잘못 들은 대목은 통화를 하면서 진행되었다. 꾸밈없는 모습과 진솔한 이야기에서 그녀의 성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차를 만들고 응송스님을 모신 시봉자답게 수줍고 여러운(겸연쩍고 쑥스럽다의 전라도 사투리) 한 여인의 삶의 편린이 묻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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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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