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대개완 蓋碗. 그림 이경남
청대개완 蓋碗. 그림 이경남

그림으로 만나는 차 이야기 9

6대다류의 완성
청나라(1616-1912) 때에 와서 차문화는 한층 정밀하게 발전되어 6대 다류인 녹차, 황차, 백차, 홍차, 청차, 흑차가 모두 만들어 졌다. 이 밖에도 차를 재가공한 화차花茶, 긴압차緊壓茶도 자리를 잡았고, 오랜 기간 차를 연구하면서 차의 제조 기술을 연구하고 끊임없이 개선하여 차의 종류도 더욱 많아 졌다. 특히 복건성 무이산의 청차가 발전하면서 차호에 우리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아주 작은 호와 찻잔으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고급 차를 우리는 기술을 뜻하는 ‘공부다법功夫茶法’이 완성되었다. 최초의 공부다법은 명대의 강서와 절강 지구의 도시에서 나타나 광동, 복건으로 전해 졌다. 처음으로 공부다법에 대해 기술된 책은 청대 초기 문인 원매(袁枚,1716~1797)가 지은 음식에 관한 책 <수원식단隨圓食單>이다. 여기에는 무이차의 맛을 묘사하면서 다기와 차를 넣는 방법을 공부차의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다. 공부차는 다기, 우리는 방법, 분위기, 환경, 음악과의 아름다운 조화를 매우 중시한다. 명,청 시대의 다인들은 최고의 경지에 이른 다예茶藝를 즐기게 되면서 공부차는 최고 전성기를 맞이 한다. 차문화의 발전은 문화 예술에도 반영되어 시와 그림, 노래, 연극,무용 등 영역에도 나타난다. 차를 채취하는 계절이 되면 아낙들은 찻잎을 채취하면서 그때의 심정을 노래했다. 지금도 각 성의 찻잎 생산지에서는 차를 따면서 하는 노래와 무용이 많이 남아 있다. 이런 노래와 민요에 민간 음악을 합해서 형성한 것이 연극, 태고극, 제등극이라 하는 지방 연극이 있다. 지방 연극의 번영도 청나라 차문화의 중대한 성과 중 하나이다

현재 세계적으로 생산량이 가장 많고 음용지역이 가장 넓은 차는 홍차인데, 홍차는 청나라 때 처음 생산되었기 때문에 청나라 말 중국 대외무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명대 주원장이 산차를 권장하면서 용봉단차 등 다른 단차는 점차 소멸 되었지만 보이차는 예외였다. 청나라 왕실 귀족들과 문인들이 보이차를 즐겨 마시면서 전성기를 맞았고 “여름에는 용정차, 겨울에는 보이차를 마신다”는 말이 생길 정도 였다. 특히 청의 옹정 연간(1729) 보이차는 황실의 공차가 되었고 외국 사절단에게 보이차와 보이차고를 선물로 주었다. 청대 초, 중기(1660~1870)는 보이차의 최전성기였으나 말기(1871~1910)에는 지나친 세금 징수로 쇠퇴기로 접어 들었다. 또 청차도 명말 청초에 만들어 졌다. 청차는 중국 다예 시연에서 쓰이는 대표적인 차이기도 하다.

도자기 산업이 꽃피우다

청차는 섬세한 다구가 어울리므로 작은 차호와 찻잔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하여 청나라 때는 도자기 산업이 고도로 발전하게 되었다. 명대의 전통을 계승한 경덕진 어기창(관요)에서 황실용 자기를 생산하였고 화려한 색감의 분채(粉彩)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18세기 초 경덕진을 다녀 간 프랑스 선교사의 기록에 ‘화병 하나를 제작하는데 장인 70 명의 손을 거친다’고 할 정도로 분업이 발달하였다. 기존 청화 백자와 오채 자기에 서양의 에나멜 기법을 도입한 법랑채(琺瑯彩)자기가 주요 생산품 으로 등장하였다. 사람들은 차에 따라 다른 다구를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점점 넓어 졌고 자사호 뿐 아니라 모양과 색이 화려한 다구들은 차생활의 만족감을 더욱 크게 해 주었다. 청이 가장 강성했던 강희, 옹정, 건륭 시기에는 도자 기술의 도약으로 뚜껑이 달린 찻잔인 개완(蓋碗)도 널리 사용되었다. 개완으로 차를 마시는 방식은 사천성에서 유래했는데, 일반 찻잔 으로도 쓰이고 차를 우리는 차호처럼 쓸 수도 있는 실용적인 차도구이다. 개완의 받침인 다선(茶船)은 당 덕종(德宗) 건중연간(建中年間, 780 ~783)에 절도사 사녕의 딸이 작은 나무판을 찻잔에 받침으로 사용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차로 인한 아편전쟁

송나라부터 원, 명나라 초기까지 중국은 차의 판매나 전파를 제한했다가 명나라 영락(永樂) 3년(1405)부터 차 수출의 길이 열렸다. 청나라 초기 차 생산량이 늘면서 조정은 민간의 차 무역을 허락했다. 당시에는 육로를 통해 몽골, 시베리아, 유럽 내륙까지 건너 갔는데, 중국차가 러시아와 전 유럽으로 전파되었다. 영국의 차 보급도 황실 귀족부터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확대되었으며 1637년, 영국의 배가 광주(廣州) 호문(虎門)에서 약 51kg의 차를 실어 가면서 중국차 수입이 시작되었다. 초기엔 주로 녹차를 가져 갔다가 배 운반으로 품질이 떨어 지는 바람에 무이암차로 바뀌었고 영국인들의 음다 습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영국인에게는 녹차 보다는 발효차가 자신들의 기호에 잘 맞았다. 발효차는 탄닌 함유량이 많아서 중국의 물에 우리면 떫은 맛이 강하지만 런던의 경수에서는 순하게 우려져 오히려 적당하게 좋은 맛이 된다.

 

이런 이유로 영국인들은 18세기에 들어오면서 차에 대한 수요가 점점 늘어났다. 트와이닝의 역사에 따르면 18세기 영국인에게 차는 생활필수품인 국민 음료였다. 18세기는 청나라의 전성기였으며 중국이 영국으로부터 수입하는 물품은 많지 않았고 무역 수지는 항상 차를 중국으로부터 대량 구입할 수 밖에 없는 영국의 적자였다. 영국이 차 대금으로 지불하는 은의 양은 결국 국가 재정을 뒤흔들 정도가 되었는데 이에 대한 대처 방법이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청나라로 아편을 수출하는 것이었다. 아편은 양귀비 열매로 만든 마약으로 중독성이 강해 심신을 병들게 한다. 영국이 수출한 아편은 담배 처럼 흡입하는 것으로 사용법이 간편해 서민들의 기호품으로 널리 퍼져 갔다. 1800년에는 청나라 정부가 아편 재배와 수입을 금지했지만 해마다 밀수입이 늘어 1827년경에는 오히려 영국과 입장이 바뀌어 은의 막대한 유출로 고민하였다. 결국 1839년 임칙서는 영국 상인들의 아편을 몰수하여 소각하였고 그에 불복하는 영국이 청나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840년에 영국 함대가 광주에 도착하면서 아편전쟁은 시작되었고 결국 1842년 굴욕적인 불평등 조약인 난징조약이 체결되면서 청의 패배로 아편전쟁은 종결되었다.

여러 왕조의 흥망성쇠를 거쳐왔지만 당시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며 가장 강대한 국가로 스스로를 인식하고 있었던 중국은 이제껏 우월한 무역상의 위치에서 흥정해 왔었다. 그러나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등의 격렬한 무역 전쟁이 계속되었고 유럽의 강대국들은 아시아를 휘저으며 동양 무역을 지배하게 된다. 중국인의 입장에서는 서양인들은 배와 대포로 무장한 ‘대양의 악마들’이었고 ‘서양 귀신들’ 이었다. 이렇게 차(茶)는 세계 역사 속에서 비극적인 전쟁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고 유럽 역사 속에서 갖가지 모험과 실험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동양의 차는 서양 악마들의 출현으로 신비의 약초, 신선의 음료라는 지위에서 졸지에 참혹한 전쟁의 원인이 되어 탐욕스런 욕망을 채우려는 양귀신의 제물로 바쳐져야만 했던 아픔이 있는 음료인 것이다. 차 한 잔에는 이렇게 아픈 역사의 상처도 담겨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셀 수 없는 낭만과 로맨스 그리고 갖가지 보석같은 이야기들이 마르지 않는 옹달샘처럼 솟아 난다. 우리의 삶은 광활하며, 차(茶)는 인생의 광활함을 수 없는 희노애락으로 빵빵하게 채운다.

글 그림 부산여자대학교 이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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