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고도. 그림 이경남.
차마고도. 그림 이경남.

약용이나 식용을 넘어 마시고 즐기는 기호 식품으로서의 차는 사회 경제 수준이 ‘생존’을 넘어 삶을 향유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비로소 탄생된다. 당나라 시대 (618~907)에 이르러서야 경제발전에 따른 문예부흥 속에서 생활을 향유하는 상류층 문인들에 의해 차는 기호 음료로 흥행하기 시작해서 널리 퍼져 갔고 중국 전역에 음용 위주의 음다 문화가 형성되었다. ‘차 마 시기’가 상류계층뿐만 아니라 일반 서민에게 까지 보급되어 전문적으로 차를 마실 수 있는 다실茶室이 본격적으로 생겨 났고, 차나무를 심고 제다 하는 사람과 차 상인이 많아 졌으며 차 세금을 매겼다.

차는 당시 쌀이나 소금과 다를 것이 없을 정도의 필수품으로 생활 속에 침투해 있었고 국가 재정 궁핍 해소를 목적으로 다세茶稅를 부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1]당나라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던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내외적인 요인이 있는데 , 나라는 강성했고 화려했으며 전쟁이 없이 안정이 되었다. 이러한 부와 안정이 가져다 준 기호식품에 대한 욕구로 차는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내적으로는 인구의 증가로 대량의 노동력이 집중적으로 필요한 차 산업이 성장할 수 있었고, 차나무 재배에 적합한 기후와 환경을 가진 남쪽 지역이 개발되었다. 또 풍요로운 시대에 차의 가치를 발견하고, 차 생산 기술의 발전 및 차의 유통을 원활히 할 수 있는 내륙 교통과 조선업의 발전 등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

외적으로는 차 소비가 북쪽으로 확대되어 국경 너머 유목민들도 차를 필요로 한 점이 생산을 더욱 자극 하였다. 음다 풍습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서쪽으로 전해지면서 중국 전역이 차를 마셨고, 양질의 차가 러시아로 퍼지는 동시에 품질이 떨어 지는 낮은 등급의 긴압차는 티베트로 들어 갔다. 양이나 말고기, 낙타의 젖 등 육식이 주식인 유목민들은 차가 다량의 지방을 분해해서 소화를 도우며 비타민을 공급해 주었다. 반대로 한족은 군사를 지킬 때 필수적인 말馬이 절실했으니 차는 곧 돈이요 무기가 되므로  말을 확보하기 위해서 충분한 차를 생산하여야 했다. 차는  실크로드를 따라 서쪽으로는 중앙 아시아, 서아시아 동쪽으로는 동남 아시아로 퍼져 갔고 바닷길을 따라 신라, 일본 등지로 전해지는 거대한 차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차마고도茶馬高道

위구르 사람들이 명마名馬를 끌고 와서 차와 바꾸어 갔고 티베트가 호시를 열어 줄 것을 청해서 전투마나 농업 발전을 위한 좋은 말이 필요했던 당나라는 차 생산을 더욱 확대해서 차마호시茶馬互市의 시조가 되었다. 당 초기 이래 둥근 떡 처럼 생긴 병차餠茶의 생산이 일반화되어 보관이나 운송이 편리해졌다. 병차를 차 덩어리라 하여 단차團茶라고도 한다. 한나라 이전 기원 전에 이미 중국 운남, 사천 지역에서 티베트로 연결되는 길이 있었고 후에 이 길로 마방들이 차를 싣고 가서 티베트의 특산품을 교역하였기에 ‘차마고도 茶馬高道’라고 불리었다. 평균 해발고도가 4,000미터 이상인 험준한 협곡들이 있는 위험한 고행길이었지만 당나라에서부터 천 년이 넘도록 마방과 말이 오간 최고로 오래된 교역로였다.

 당나라 전다법煎茶法

당나라 이전에는 야채나 생강 등을 넣고 차를 죽 처럼 끓여서 마셨는데, 이를 ‘자차법煮茶法’이라고 하고, 차 죽의 형태로 현대 까지 전해지고 있다. 당대의 차는 압력을 가해서 찐차(증청)로 만든 병차(떡차) 같은 고형차를 쌀알 크기 만큼 조각 내거나 가루 내어, 소금 이외의 부재료를 섞지 않고 솥에 끓인 차를 마시는 ‘전다법煎茶法’이었다[2]

1.굽기; 복잡한 제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단차를 수분이 완전히 증발할 때까지   풍로의 불로 굽는다. 차의 향기는 차를 고온에 말릴 수록 좋아진다.

2.갈기: 차가 식은 후 목제 차연(차 맷돌)에 넣어 가루로 만든다.

3.체질; 쌀알 정도의 굵기로  체에 쳐서

4.끓이기; 풍로의 솥에서  물이 처음 끓을 때 적당량의 소금을 넣고, 물이 두 번째로 끓어 오를 때  조심스럽게 갈아 놓은 차를 솥에 넣어, 물이 세번째로 끓어 오르면

5. 담기: 국자로 퍼서 찻사발에 마신다.

육우陸羽, 차계를 평정하다

이렇게 당에 이르러서야 약이나 음식이 아닌 ‘마시는 차’의 개념이 들어간 끓여 먹는 방식의 음다법이 처음 등장하였고 화려한 당나라의 문화 속에서 차문화가 문학이나 예술로 피어 났다. 차는 더 이상 약이나 식량이 아니었고 정신을 맑게 깨우는 번뇌의 치유제였다. 당나라 때는 차 산업 뿐 만 아니라 차 문화도 크게 발전했는데, 바로 ‘육우( 陸羽 734 ~804)’ 라는 인물로 인해서 중국의 차가 문화와 예술로 승화되었다. 육우는 당나라 천조 13년 (754년) 고아로 태어나 시골의 사찰에서 ‘지적智積’이라는 스님이 절 앞에서 기러기 세 마리가 갓난 아이를 보호하고 있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서 데려왔고, 기러기의 보호를 받았다는 뜻에서 ‘깃털 우羽’라는 이름을 썼다.

절에서 자란 육우는 자연스레 차를 많이 접했다. 승려가 되기 싫었던 육우는 차 연구 기행을  떠나 780 년  ‘세계 최초의 차 백과사전’인 <다경>을 집필 이후 1,400여 년간 ‘차학茶學’ 이라는 규범을 만들어서 현대까지 이어 온 큰 공을 세웠다. 한 분야의 경전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탄탄한 권위를 의미한다. <다경>은 총 3권 10장으로, 차의 기원과 재배, 차 도구와 차 우리기, 음다법과 차 산지 등을 망라한 내용들로 씌어졌다. 육우는 차에 다른 부 재료를 넣어서 차를 탕이나 국처럼 마시는 것을 원치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위한 음료이자 문화의 표현으로서 차의 의미를 확대해 당대의 최신 기류를 만든 첨단 트렌드세터(trend-setter)였다.

차는 성질이 차가우므로

행실이 깨끗하고 덕망 있는 사람이

 마시기에 가장 적합하다.  육우 <다경>

또한 육우陸羽는 “차는 정행검덕精行儉德한 사람에게 적합하다”고 차를 도道 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차를 우리는 행다 과정에서 인생의 본질과 원리를 찾는 다도정신茶道精神을 정립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육우는 의례화된 다도의 행다법이 현재의 삶을 깨어 있게 하고 현존하게 하며 인생의 아름다움을 관조하게 해준다고 믿었다.

<다경>이 출간되자 육우는 명성이 천하에 자자해졌다. 황제가 관직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많은 시인과 문인, 스님들과 교류하는 자유를 택할 정도로 성격이 호탕했으며 마음이 깊었다. <다경>이 이 세상에 나온 이래 1200여년이 흘러 갔다. <다경>은 차에 대한 모든 것을 망라한 내용으로 아직도 전 세계의 언어로 번역 되어 출간 되고 있다. 어쩌면 이를 넘어서는 다서茶書는 앞으로도 출현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차를 지극한 마음으로 연구했던 육우의 이십 여년 간의 인고와 열정의 산물이어서 일까. 육우의 공로는 그의 사후에도 더욱 올라가서 차신茶神으로 추앙 받았다.[3] 그의 업적과 공로를 떠나 육우는 가히 당대에 나온 걸출한 다인茶人으로 진정 차를 사랑했던 ‘세계 최초의 차 덕후茶德厚’라 할 수 있다.

[1]누노메 초후, 중국끽다문화사, 동국대학교출판부, 2011, p.129

[2] 김세리 조미라 , 차의 시간을 걷다, 2020

[3]강판권, 차 한잔에 담은 중국의 역사, 지호, 2006, p.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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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그림 부산여자대학교 이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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