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선 초기에 제작된 찌그러지거나 얼룩덜룩한, 다소 ‘불량한 외관’을 가진 일부의 찻그릇 무리를 감상하면서 ‘자연스럽다’라고 표현한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도자 미학은 이처럼 인위적인 손길을 줄여 ‘자연스럽게’ 빚어내는 데 있으며, 이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조선의 찻사발이다. 조선의 찻사발은 가히 세계 최고라 평가되곤 한다. 일본에서 우리의 다완(茶碗)은 국보로 지정돼 소중하게 다뤄지고 있을 정도로 문화적·역사적·미학적 가치를 지닌다. 갤러리인사1010에서 열리는 <조선 찻사발에 담茶_조선의 사발, 500년의 역사>전은 국내 최대 규모의 전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일본에서 국보와 문화재로 지정된 그릇인 이도다완과 호조코히키 류 30여 점을 포함 전 세계 유일 모양의 다완인 덤벙무늬발(호조코히키), 조선도공이 히라도에 잡혀가 만든 토토야차완, 임진왜란 때 조선 도공이 만든 킨카이 네꼬가키 등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제작된 희소가치가 높은 다완 약 90여 점을 어렵게 한데 모았다. 이 전시를 위해 정해미술관 지헌영 관장은 전국을 돌며 조선 찻사발 소장자들로부터 다완을 제공받았다. 이번전시 소개될 조선찻사발들을 작품설명과 함께 미리 만나본다.

▲ 회청사기완灰靑沙器碗(코-이도 차완小井戸茶碗) 개인소장
▲ 회청사기완灰靑沙器碗(코-이도 차완小井戸茶碗) 개인소장
▲ 회청사기완灰靑沙器碗(코-이도 차완小井戸茶碗) 개인소장

회청사기완灰靑沙器碗(코-이도 차완小井戸茶碗) 개인소장

센리큐千利休의 차 스승이라고 알려진 타케노조-오-武野紹鷗(1502~1555)는 사카이堺市에서 무기와, 가죽을 거래하는 거상巨商이면서 렌카連歌 시인이었다. 그는 조선에서 입수한 그릇의 굽에 유약이 터지고 뭉친 모양을 보면서 무사들의 칼 손잡이 장식인 사메鮫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판매를 목적으로 당시 조선과의 무역을 독점하던 오-우치가문大內家(1557 멸족)을 통해 웅천(1480~1500초)지역의 그러한 그릇들을 수입 혹은 주문했다. 사메를 싸고 있는 장식을 이토絲 혹은 츠가이토柄絲라고 한다. 타케노조-오-는 유명한 렌카 시인이었기에 그릇의 이름에 이토(이도)라는 이름를 붙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운두가 낮고 측사면의 곡률이 거의 없는 청자완의 형태로 안바닥에 큰 원각과 나선형의 물레선 자국이 있다. 굽 외면을 다듬은 자리에 유약뭉침과 터짐이 생겼으며 보는 각도에 따라 죽절굽처럼 보이기도하지만 역사다리꼴의 일반적인 다리굽이다. 유색은 비파열매의 황갈색을 띠며 굽 안까지 전면시유하여 사질내화토를 받쳐 구웠다.

▲ 분장회청사기 인화귀얄무늬접시粉粧灰靑沙器 印花귀얄무늬楪匙(니토쿠미시마 히라차완二徳三島 平茶碗) 영관스님 소장
▲ 분장회청사기 인화귀얄무늬접시粉粧灰靑沙器 印花귀얄무늬楪匙(니토쿠미시마 히라차완二徳三島 平茶碗) 영관스님 소장
▲ 분장회청사기 인화귀얄무늬접시粉粧灰靑沙器 印花귀얄무늬楪匙(니토쿠미시마 히라차완二徳三島 平茶碗) 영관스님 소장

분장회청사기 인화귀얄무늬접시粉粧灰靑沙器 印花귀얄무늬楪匙(니토쿠미시마 히라차완二徳三島 平茶碗) 영관스님 소장

내면에 인화무늬 외면에 귀얄무늬가 장식된 분청사기는 15세기 말에 성행한 귀얄무늬, 덤벙무늬, 철화무늬에 이어서 16세기 초에 등장했다. 분청사기의 쇠퇴와 소멸이라고 불리던 시기, 그리고 이미 백자에게 공품의 자리를 내어주고 품질 유지의 의무에서도 벗어난 그 시기에 엄선된 재료와 심미적인 표현기술이 결합된 인화귀얄무늬는 분청사기가 가진 아름다움의 모든 것이 담겨있는 진수다. 일본식 분류명인 니토쿠미시마二徳三島는 시후쿠 제작자인 니토쿠二徳가 소유한 분청사기三島라고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굽이 높은 접시의 형태로 내저원 안에 세 송이의 국화 인화문이 승렴문에 둘러싸여 있다. 외면 상부의 절반가량은 귀얄무늬로 장식되어있으며 역사다리꼴의 높은 다리굽을 가지고 있다. 굽 안까지 전면시유하여 점질내화토를 받쳐 구웠다. 운두가 많이 낮은 접시의 형태지만 일본에서는 여름에 사용하는 차완으로 분류하고 있다.

▲ 분장회청사기 덤벙무늬발粉粧灰靑沙器 덤벙文鉢(코히키 차완粉引茶碗) 정정호 소장
▲ 분장회청사기 덤벙무늬발粉粧灰靑沙器 덤벙文鉢(코히키 차완粉引茶碗) 정정호 소장
▲ 분장회청사기 덤벙무늬발粉粧灰靑沙器 덤벙文鉢(코히키 차완粉引茶碗) 정정호 소장

분장회청사기 덤벙무늬발粉粧灰靑沙器 덤벙文鉢(코히키 차완粉引茶碗) 정정호 소장

조선건국(1392) 후 개국공신인 여진족들이 책봉되어 충청도와 전라도에 집중적으로 정착했다. 그들은 현재 쳔루요陳爐窯 등 북방계 자기라고 분류되는 문화를 가져와 퇴화한 상감청자인 상감분청자와 상감인화분청자에서 박지, 조화 등의 분청자 즉 본격적인 분장회청사기로의 이행에 큰 동력이 되었다. 1467~1469년 관요가 생기면서 지방의 자기들은 공품의 의무가 줄어 쇠퇴(변화)하기 시작했다. 일정한 품질 유지를 위한 인화문이 점차 사라졌고, 북방계 자기의 영향과 노동을 겸한 제작환경은 때로는 발전을 때로는 퇴보를 가져오기도 했다. 1466년 진상품과 공적인 일 외에는 백자의 사용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미 백자는 시대의 흐름이었기에 공품의 의무에서 제외된 가마들은 회청사기를 백토로 꼼꼼하게 분장하여 백차처럼 보이는 그릇을 제작했다. 물론 굳이 암청색의 태토를 사용한 이유에 관하여 여러가지 이견이 있고, 보성 도촌리에서는 예빈명 덤벙무늬가 출토됨에 따라 일본 사신단(통교단)과의 연관성도 언급되고 있기도 하지만 보성과 고흥 등 주요 요지 출토품의 대부분이 발과 접시 등의 식기인 점을 본다면 백자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덤벙무늬를 탄생시켰다고 볼 수 있겠다. 전형적인 발의 규격으로 측사면은 거의 직선에 가까우며 전은 살짝 외반 되었다. 굽 안까지 전면 분장/시유하였고 굽 바닥을 닦아 점질모래빚음으로 받쳐 구웠다.

▲ 분장회청사기 귀얄무늬발粉粧灰靑沙器 귀얄文鉢(하케메 차완刷毛目茶碗) 최웅택 소장
▲ 분장회청사기 귀얄무늬발粉粧灰靑沙器 귀얄文鉢(하케메 차완刷毛目茶碗) 최웅택 소장
▲ 분장회청사기 귀얄무늬발粉粧灰靑沙器 귀얄文鉢(하케메 차완刷毛目茶碗) 최웅택 소장

분장회청사기 귀얄무늬발粉粧灰靑沙器

귀얄文鉢(하케메 차완刷毛目茶碗) 최웅택 소장

웅천도요지는 1450~1500초에 운영 되었으며 발굴범위 내에서 6기가 있다고 조사되었다. 특이한 점은 도굴로 인하여 심각하게 훼손되어 정확히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1호와 2호, 3호와 4호, 5호와 6호 가마가 겹쳐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2004년 웅천도요지 보고서에 따르면 대부분의 출토품은 발과 접시 등의 일반기라고하며. 그 중의 일부에서 굽부분의 유약뭉침/터짐 즉 카이라기梅花皮가 발견되고 있다. 오사카 후지타미술관藤田美術館이 소장하고 있는 오-이도차완大井戸茶碗 銘 호-라이蓬莱는 타케노조-오-(1502~1555)의 소장품으로 지름이 152~155(mm) 다. 국보로 지정된 혼다本多는 지름이 154(mm)다. 또 1578년 야무노우치 소-와藪内宗和가 사용했을 소-규宗及는 157~160(mm),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센리큐의 차회기茶會記에 자주 등장하는 츠츠이즈츠筒井筒는 152~155(mm) 그 외 대부분의 이도차완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16세기 초반에 폐요된 가마에 16세기 중반 조선발의 크기를 줄여 차완의 크기로, 예전의 그런 유약뭉침/터짐이 있는 그릇이 주문이 들어가 가마를 다시 짓고 제작한 것은 아닐까요?이 시기 조-일 고려차완 무역에서 일본내 총책인 시마이 소시츠嶋井宗室와 중계자 쓰시마소씨對馬宗氏 그리고 운반책 나카야마 바이간中山梅岩이 주고 받은 문서의 고려차완발高麗茶碗之鉢 등의 기록(1565)으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측사면이 거의 직선으로 뻗쳐있으며 구연부는 직립되어있다. 굽에서 측사면으로 연결되는 부분이 양감있게 벌어져 내면의 저면공간이 평평하고 넓다. 백토 귀얄무늬가 내면의 중상부에 원형으로 장식되어있다. 일본에서는 이도차완과 재질상의 유사함으로 소바차완そば茶碗 혹은 곡식이 영근 밭의 풍경이라고 소바차완蕎麥茶碗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러한 그릇은 15~16세기 조선시대 분청사기 요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크기와 형태 그리고 장식기법을 가지고 있기에 차를 마시기 위한 주문품으로 연구되고 있으며 이는 웅천도요지를 비롯한 조선의 여러 가마와 일본에 전래하고 있는 조선의 다완의 중요한 연결고리다.

▲ 백자발白磁鉢(타마고데 차완玉子手茶碗) 정해미술관 소장
▲ 백자발白磁鉢(타마고데 차완玉子手茶碗) 정해미술관 소장
▲ 백자발白磁鉢(타마고데 차완玉子手茶碗) 정해미술관 소장

백자발白磁鉢(타마고데 차완玉子手茶碗) 정해미술관 소장

1466년 조선은 진상품과 공적인 일 외에 백자의 사용을 금지한다. 그 실효성을 얻기 위하여 지방 가마에서 백자 제작을 금지하고 1467년 경 설치된 관요에서만 백자를 제작케 했다. 이 즈음인 15세기와 임진왜란이 발발한 16세기까지의 백자는 관요/지방요 할 것 없이 엄선된 재료를 사용하고 갑발에 번조하는 등 17~8세기 보다 전반적으로 그 품질이 좋았다.임진왜란 전후로 일본으로 전래된 백자발 중에서 일반적인 회백색 계열과는 구별되는 달걀의 흰 껍질색 혹은 파스텔 흰색을 특징으로 하는 그릇들이 있다. 일본에서는 이러한 그릇들을 타마고데차완玉子手茶碗이라고 분류하고 일반 백자발과는 구별해 사용하고 있다. 그릇의 하단부인 내저면 경계부에서 꺽여 사선으로 구연부까지 이어진 조선 초기의 전형적인 발의 형태다. 다소 높은 듯 보여지는 수직형 다리굽이며 접지면이 좁다. 유색은 파스텔 톤의 회백색이며 부분적으로 청백색의 요변이 있다. 두껍게 전면 시유하였고 방향성을 가진 빙렬이 있습니다. 사질 내화토를 받쳐 구웠다.

갤러리 인사1010의 이번 전시기간 중에는 조선 찻사발을 체험하는 세션이 마련되는데, 티라운지에서 진행되는‘조선 차놀이’와 뷰잉룸에서의‘조선 다신계’의 두 가지 코스가 있다. 조선의 다완을 직접 만져보고 차를 마시며 오감으로 느끼는 경험은 네이버 예약과 현장 결제로도 이루어진다. 본 전시는 소장자의 소중한 기물을 볼 수 있는 전시이므로 입장권을 구입해야 하며, 자세한 내용은 갤러리 인사1010의 대표번호로 문의하면 된다. 갤러리 인사1010-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10길 10 02-722-87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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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능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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