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알면 알 수록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지식이 되었건 삶이 되었건 ... 안 다는것, 알고 있다는 것, 지구를 다 돈다고 지구에 대해 다 알 수 있을까. 그래서 세상은 온통 경이로움 그 자체다. 일주일 정도 편차를 두고 대만의 지인으로부터 두번의 차를 부탁해서 받았다. 소통의 부재로 내가 찾는 맛의 차가 아닌 탓에, 혹은 내가 찾는 맛의 차를 정확하게 보낸 탓에 다시 부탁을 했다. 한가지 차는 마음에 들고 한가지 차는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합차라고 받아 마셨던 동방미인을 작정하고 감별하면서 마셨는데 나의 입맛을 사로잡지 못했다.

병이다. 병...

그런데 어쩔 수가 없다. 차를 연구 하는 내 입장에서는....

가끔 진심으로 말 한다.

“마로단차를 좋아 하며 극찬을 하는 분들을 이해 못하겠다.”

내 차에 대해 스스로 흡족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진심이다. 황홀한 맛, 그리고 그것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느날은 황홀지경의 맛일 때가 있다. 그래서 차는 ‘신령스럽다’라고 말 하는 것일까. 40년 전 차를 최초로 우려 주셨던 스님은 ‘유난 떨지마라. 차맛이 차맛이다. 뭐 특별한 맛이 있겠냐!’하신다. 마음 공부와 차맛을 알아가는 일...그외에 일은 그냥 놀이다.

며칠 전에 받은 동방미인 시합차 우량장은 나의 혀끝을 사로잡지 못했다. 그동안 있으면 마시고 없으면 안 마셨던 동방미인 작정하고 달려들어 마셔봤다. 차 맛을 알면 알수록 늪에 빠져 헤어 나올 수 없는 것 같이 된다. 마음 공부도 그렇다. 끝이없다. 완성이 없다. 차 맛을 알아가는 길이 그렇다.

선다일여茶禪一如.

차맛을 알아가는 것과 마음을 들여다 보는 공부가 동급인 것이다. 평소에는 마로향차로 아침을 여는데 오늘은 어제 받은 동방미인을 품었다. 삼등장 시합차.

햐~~~차향이 겸손하라고 내게 이른다.

같은 차를 같은 사람이 마신다. 불이 다르고 탕관이 달라졌다. 그 무엇이 정답일까. 숯불에 무쇠 탕관에 물을 끓였다. 가스불에 무쇠탕관에 물을 끓였다. 그냥 전기포트에 물을 끓였다. 물맛이 완전 달라졌다. 어떤 것이 차맛일까.

안다는것, 알고있다는 것, 이 모두가 허구가 될 수 있다. 이 삼복더위에 이틀 동안 귀찮아도 숯불을 피웠다. 간사한 혀끝 미각을 최고치로 올려보기 위해서다. 쫒지말라. 구하지 말라. 타이르면서도 멈출 줄 모르고 좋은 차맛을 향해 달린다. 차 맛 쫒는 혀끝도 마음자리도 감정에 이입되어 멈추지 않고 달린다.

어떤 맛이 차 맛일까.

어떤 것이 마음 자리일까.

차맛과 마음이 둘이 아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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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다연 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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