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곳도 가는 곳도 정한 바가 없어야 하는 것이라고, 차 한 잔이 있으면, 강이 되었든 언덕이 되었든,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라고 생각 하며 그냥저냥 평생을 살아왔다.
온 곳도 가는 곳도 정한 바가 없어야 하는 것이라고, 차 한 잔이 있으면, 강이 되었든 언덕이 되었든,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라고 생각 하며 그냥저냥 평생을 살아왔다.

원고를 쓰기로 마음 먹은지 일주일이 지났다. 글쓰기를 하는데 유독 할 말이 없는 것 세가지가 있다. 차 이야기, 섬진강 이야기, 그리고 불교이야기. 이 세가지에 대하여 글을 쓸려고 하면 막상 할말을 잃는다. 세가지가 내 삶의 전부였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고향인 청학동아래 산골은 그때만해도 오지중 오지였다. 아홉살때 동네 언니들을 따라 버스를 처음 타고(아마 버스를 탄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같다) 하동읍에 열리는 군민체육대회 구경을 갔다. 그렇게 푸르고 큰 섬진강과 넓은 백사장 그리고 아름드리 소나무가 빽빽히 심어진 솔숲은 어린 나에게 신선하고 신비스러운 충격이었다. 학창시절 첫 편지를 주고 받았던 수야와 어둠속 별빛을 보며 알수 없는 두근거림을 안고 요즘 말로 첫 데이트를 했던 곳이 하동송림 솔 숲이었다. 수야는 지금 생각하면 나보다 조숙했다. 벌써 뭘 좀 아는 폼쟁이었던 같다. 만나면 어김 없이 윤동주의시 < 별헤는 밤>을 낭송 해주곤 했다.

내 평생이 온전히 수행자로 살고, 차향기로 살고, 날마다 섬진강을 거닐고 살고 있는데, 매화가 핀다고, 꽃이 핀다고, 강가에 바람이 분다고, 내 마음이 어디로 가는것도 아니고 꽃을 눈으로 봐야만이 꽃 구경이 아닌 것이다.
내 평생이 온전히 수행자로 살고, 차향기로 살고, 날마다 섬진강을 거닐고 살고 있는데, 매화가 핀다고, 꽃이 핀다고, 강가에 바람이 분다고, 내 마음이 어디로 가는것도 아니고 꽃을 눈으로 봐야만이 꽃 구경이 아닌 것이다.

나 역시 그림 잘 그리는 사촌에게 부탁해 시를 적고 그림을 그려 선물을 했던 기억이 생각난다. 지금 생각 하면 내가 그 정도로 유치한 발상(?)을 했던 것이 우습기도 하고 내심 < 아니 그 많은 시 중에 하필 그 시를 왜 적어 선물로 했을까> 싶다. 그 시를 오늘 아침에 처음으로 전문을 읽어 보고 나는 열일곱의 나에게 또 놀란다. 당시에도 보통 이성을 만나면 이루어질 사랑을 꿈꾸는데 나는 떠나는 사랑을 꿈 꾸었던 것이다. 행복을 꿈 꾸는것 보다 애뜻한 삶을 이상적으로 생각 했던것 같다.

내 나이 열일곱에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고 나는 주인공 쟌느의 가혹한 결혼 생활보다 마지막 모습 쟌느를 늘 동경하던 사춘기가 있었다.

“인생은 그져 그런 것이다”

그 탓에 살면서 힘들고 슬픈 일을 겪어도 나는 오히려 영화나 드라마속 주인공 정도로 생각하며 이겨낼 수 있었다. 아마도 마지막 모습의 쟌느를 동경하는 마음이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 해본다. 출가 후 수야와 통화를 두번 해보았다. 나는 그냥 만나면 차 한잔 할 수 있었으면 하는데 녀석이 피한다. 편지를 사개월 동안 주고 받다가 내가 먼저 출가의 뜻이 있어 “우리는 더 이상 이성의 친구가 될수 없어”라며 당돌하게 이별 편지를 했던 걸 기억한다. 나 에게 섬진강은 그런 곳이다. 또 차 이야기와 불교 이야기는 다반사와 같은 것이다. 늘 하루 세끼 먹는 밥 이야기를 하는 일이 뭐가 재미있겠나 싶다. 어제 선방수좌가 하루를 묵고 떠났다.

“앉는것이 공부 인줄 알고 사는 수좌가 90%가 넘어요”

“불교에 질문이 있고 답이 있으면 그것은 불교 아니예요”

“모두가 자가당착에 빠져있어요.”

우리는 만나면 서로 각자 가고 있는 길에서 느끼고 본 것을 주고 받는다. 일년에 한 번은 꼭 나를 찾아 주는 스님이 참 도반이라는 생각을 한다. 차를 만들고 연구하는 나는 거꾸로 고급 보이차를 그 스님을 통해서 얻어 마신다. 재산이라고는 오로지 전국 선방과 걸망 하나 뿐인 스님이 늘 나에게 고급 차를 선물 한다. 대궐(?) 같은 집을 지킨다고 그런 차 한편 사 마시지 못하는 꼴을 보면서 나는 무엇을 생각 하겠는가. 비구니 선방으로 첫출가를 했고 집에 앉아서 일년에 한번씩 만나는 스님께 비구스님들의 선방 이야기를 듣는다. 그런 이야기가 내 공부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그냥 도반이랑 만나 차 한 잔 나누는것이 최상의 시간인 것이다. 차 맛이 어떻고, 무슨 차가 어떻고, 간화선이 어떻고, 섬진강이 어름답다고 제 아무리 이야기 하고 글로 쓴들 무슨 문장이 나오겠는가.

봄 바람이 불면 내 뜨락에 목숨을 버린 적목련이 하나 둘씩 자리하게 될 것이다. 꽃의 조락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짧고 허망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봄 바람이 불면 내 뜨락에 목숨을 버린 적목련이 하나 둘씩 자리하게 될 것이다. 꽃의 조락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짧고 허망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내 평생이 온전히 수행자로 살고, 차향기로 살고, 날마다 섬진강을 거닐고 살고 있는데, 매화가 핀다고, 꽃이 핀다고, 강가에 바람이 분다고, 내 마음이 어디로 가는것도 아니고 꽃을 눈으로 봐야만이 꽃 구경이 아닌 것이다. 보길도 윤선도의 정자 세연정을 다녀 온후 나는 도량에 꽃을 더 열심히 심는 나를 본다. 벚꽃 나무 아래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있는 나를 본다. 군위 사유원 두달 살이 하고 돌아와 내가 살고 있는 이 공간이 최상의 사유원라는 생각을 했다. 민들레 밭에서 돌아와 점심 먹고 벚꽃 나무 그늘에 쉬고 있는데, 인도 여행에서 만나 큰 신세를 졌던 인도에 한국식당 <정락정> 대표에게서 뜻밖에 연락이 왔다.

“스님 오시면 언제든지 방하나 비워 놓을께요”

“아이고 나 이제 정토사에서 어디도 안가고 살려고 마음 먹었는데 인도 유혹은 못 떨치겠네요”

온 곳도 가는 곳도 정한 바가 없어야 하는 것이라고, 차 한 잔이 있으면, 강이 되었든 언덕이 되었든, 그곳이 내가 있을 곳이라고 생각 하며 그냥저냥 평생을 살아왔다. 나는 한때 스승 경허와 제자 만공 사이를 너무 부러워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생각 해보니 도처에 만공이 있고, 경허가 있었고, 만나 왔는데 내가 못보고 인식 하지 못한 것이었다. 아침에 첫사랑(?) 수야게게 선물로 준 시화에 적힌 시를 다시 읽어보니 내가 그때 마음이나 지금 마음이 별반 달라진것이 없어 보인다. 괜시리 내가 나에게 <너는 역시 그때도 지금도 영원한 집시였구나 >라는 말을 해본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내 마음은 촛불이요,

그대 저 문을 닫아 주오.

​나는 그대의 비단 옷자락에 떨며,

고요히 최후의 한 방울도 남김없이 타오리다.

​내 마음은 나그네요,

그대 피리를 불어 주오,

​나는 달 아래 귀를 기울이며,호젓이

나의 밤을 새이오리다.

​내 마음은 낙엽이요,

잠깐 그대의 뜰에 머루르게 하오.

​이제 바람이 일면 나는 또 나그네 같이,외로이

그대를 떠나오리다.

열일곱 살 내가 여전히 60의 내가 한 마음으로 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오래전 열 일곱에 헤어진 동무인 ‘나’를 만나는 아침이다. 앞으로 내 삶이 더 깊고 더 넓어 더욱 평화롭게 살것 같은 예감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저어 나 에게로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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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다연 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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