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녹차수도 보성군청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아름다운 보성의 한 다원에서 코로나극복을 위해 찻잎따기 일손돕기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녹차수도 보성군청 직원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아름다운 보성의 한 다원에서 코로나극복을 위해 찻잎따기 일손돕기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녹차수도 보성군차역사를 밝혀주는 연구논문이 발표됐다. 본지는 보성군의 자료제공으로 삼국시대부터 이어져온 보성군차역사를 연재한다.<편집자주>

보성에는 ‘토산품’으로 차를 이용했다는 ‘보성군사’의 기록이 있다. AD369년(근초고왕 24년) 3월 마한馬韓의 비리국卑離國이 백제百濟의 복홀군伏忽郡으로 통합될 때 토산품으로 차를 이용했다는 설이다. ‘비리’는 마한의 소국 이름에 많이 붙여지고 있는 말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마한에는 모두 54국이 있었다. 마한의 ‘비리’의 어원은 ‘불火’이라고 생각한다. 마한의 ‘비리卑離’는 백제의 부리夫里, 복홀伏忽, 파부리波夫里, 신라의 벌伐· 불弗 · 불火과 같이 평야 · 읍락邑落 · 나라 등의 뜻을 지니는 말이다. ‘비리’는 백제에서 ‘복伏’으로 불렀다. 여기에 성城과 골谷의 뜻을 지닌 홀忽이 붙어 <복홀>이 된다. 현 보성군 미력면이다.

복홀군 성지城址는 석호산 아래 화방리 장골이다. ‘복홀’은 신라 경덕왕 757년 한화정책漢化政策에 따라 뜻으로 해석해 한자를 바꾸니 <보성寶城>이다. 백제의 복홀군은 고려말까지 보성의 도읍지였다. 한편 현 복내福內의 옛 지명 복성현의 ‘복성福城’ 역시 ‘보성寶城’과 같은 뜻이다. 불弗 > (파 : 波) 부리夫里 > 복伏은 유사한 음이면서 좋은 뜻을 가진 복福, 보寶로 썼다. 마한의 비리국을 복홀군으로 편입한 백제가 복홀차를 이용했다고 한다. 백제는 불교가 전래하기 전 고이왕(234-286) 무렵에도 이미 차 생활을 하고 있었다. 백제 귀족층 묘에서는 차 도구 추정 유물들이 다량 출토되었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에서 말차용抹茶用 절구인 차확茶確 11개, 풍납토성에서 음식이나 차를 끓이는 청동 초두鐎斗, 청자완靑磁碗 3점이 나왔다.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 책임자 권오영權五榮 교수는 “3세기 무렵 이미 백제의 지배층은 차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있었다.”라고 한다. 서진(西晉: 265–316)의 도자기 계수호(鷄首壺: 닭 머리 주둥이 주전자형 도자기)와 사발형 청자 ‘완碗’ 이라는 다기茶器가 발견되었다.

정영선은 <한국의 차 문화>에서 ‘찻사발茶甌’로 다유茶乳를 마시고, 다완茶碗은 주로 다탕茶湯을 마셨다. (p.147)’고 하면서 고려전기에는 반드시 구분했다고 한다. 이 구분에 의하면 출토된 찻사발은 완碗 보다는 구甌로 부르는 것이 맞겠다. 차가 서진에서 전래하였거나 우리나라 토산차를 마셨다고 할 수 있다. 서진 시대(265–316)이므로 적어도 316년 이전에 백제는 차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가야, 마한의 토산차를 이용했거나 서진으로부터 차가 들어와 있었다는 증거다. 차의 전래는 통상 불교의 전래나 사찰의 건립보다 앞선다. 백제의 불교 공인(384)이나 동진(317-420) 마라난타의 불회사 창건(366)보다 서진 시대 고이왕(234-286)은 80년에서 100년이 빠르다.

백제는 고이왕 때(234-286) 목지국目支國을 병합한다. 그러나 아직도 차 산지인 전라도의 마한의 소국小國들은 편입하지 못했다. 차를 좋아하는 백제의 귀족층들과 조정에서는 토산차를 직접 차의 공납을 받을 수 없었다. 필요한 차는 전라도 지방인 마한에서 구했을 것이다. 근초고왕 24년 369년에 드디어 보성의 비리국을 병합한다. 복홀군으로 편입하니 비로소 비리국에서 나는 <토산차土山茶>를 공납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백제 조정에 바친 공납차인 <복홀차伏忽茶>이다. <토산품인 토산차>는 전래한 차가 아니다. ‘토착화된 자생 차가 있다.’는 반증이다.

전래한 차를 토산품이라고 붙이지 않기 때문이다. 369년 복홀군 편입 당시 인정받은 토산품이라면 보성 복홀차의 차시배茶始培 시기는 369년보다 훨씬 그 이전이었을 것이다. 최소 몇백 년의 세월이 흘러야 토산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백제 복홀군의 치소였던 장골 부근 돌음[석호石虎] 마을엔 백제 시대 ‘돌음절터’인 ‘석호사石虎寺 터’가 있다. 석호마을 석호 회관에서 720m 지점인 화방리 188-1번지 백제 절터 ‘원당元堂터[원당사터元堂寺址]’가 있다. 이곳엔 백제 시대의 흔적을 가진 절터가 두 곳이나 있다. 원당 옆엔 원댕이샘이 있고 산정재山井峙가 있다. 물이 좋고 터가 좋아 백제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물이 좋은 곳에 당연히 차가 빠질 수 없다.

복홀차의 흔적일까? 김주희 등의 보성차의 역사 및 자생차 실태 연구에 따르면(2007) 복홀 장골이 있는 현 미력면 화방리는 <표1>과 같이 4곳의 자생차 단지가 조사되었다.

1번과 4번은 사원용寺院用이었을 것이다. 1번은 현 녹차 휴게소 정북방 400m에 있었던 절골에 있는 옛 절터 위로 석호산 7부 능선까지 있다. 남쪽 600m 아래에 둔터[둔기屯基] 마을이 있다. 4번 폐사지는 백제의 절 원당사터다. 둔터 마을은 1번이나 4번의 폐사 다촌茶村 기능을 했었을 가능성이 있다. 남으로 보성강을 건너 2km 떨어진 겸백면 용산리에는 다동茶洞이 있다. 광산김씨 김모金瑁가 1455년 은거한 이웃 화천花泉마을에서 1539년 이주하여 생긴 마을이다. 마을 뒤 차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차밭등> <찻골>로 부르다가 1914년 다동(茶洞, 찻골)으로 바꿨다. 지금도 차가 많이 자생하고 있다. 4번은 폐사지로 밭을 갈다가 청동기 불상이 출토되었다 한다. 원당사元堂寺가 있던 곳이다. 그리고 3번은 민가의 대밭에 심어져 민가용民家用으로 보인다. 대밭으로 둘러싸여 차광도 80% 이상이다. 주목하는 것은 2번 장골 차밭이다. 크기도 9,000㎡로 제일 크다. 장골(장동, 長洞)은 복홀군 중심 마을이다. ‘복홀(골)’에서 골짜기가 길다는 뜻으로 ‘장골’로 변천되었을 것이다.

김주희 등의 조사에 의하면 복홀군 토산차가 해당 마을 지역 뒤 철탑 밑에서 8부 능선 계곡 동남향으로 좌우로 펼쳐져 있다. 경사도 50도 정도로 가파르고 대나무 잡목으로 차광도遮光度는 60% 정도. 2004년 자생지 복원사업으로 장애가 되는 나무를 제거했다. 약간 검은 색 참흙으로 복원사업 시비로 유기물 함량이 조금 높다. 인산과 마그네슘, 칼륨, 칼슘 등 미량요소가 적은 처녀지다. 장골 마을 북풍을 막아주는 뒷산과 동남쪽 석호산이 가로막은 요지凹地로 기류 이동이 막혀 서리 피해가 심하다. 따라서 차밭이 산 하단보다 중턱으로 위치하여 서리나 동해 피해가 적었을 것으로 본다.

복홀차의 원산지 가능성이 제일 큰 장골 자생 차밭과 석호산 부근의 차밭은 더 조사 연구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다. 박용구 등이 2009년 38개 야생 차나무 군집의 유전자 분석을 시도한 바 있다.(박용구 등, 우리나라 야생 차나무 유전자원 보존, 2009) 그러나 아쉽게도 보성 둔터차(1번)는 포함했으나 이곳 장골차(2번)은 빠져 있다. 복홀성지伏忽城址 조사연구, 장골 차밭 조사를 통해 복홀 토산차와 연관성 등 연구 조사가 절실히 필요하다. 연구용역 - 목포대학국제차문화산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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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 보성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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