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미학사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 이자 설치예술가인 이우환의 예술관 비교를 통해 일상생활에서의 아름다움을 찾는 법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일본의 미학사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 이자 설치예술가인 이우환의 예술관 비교를 통해 일상생활에서의 아름다움을 찾는 법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이우환과 야나기 무네요시는 같은 시대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 둘의 예술세계를 관통하는 주제가 있다. 불완전에서 오는 완전함의 미학이 그것이다. 완전함이라는 것은 더하기나 곱하기의 개념이 아니다. 아무리 더해나간다고 할지라도 완전에는 도달 할 수 없다. 비워냄을 통해 채우는 것이 도달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에 도달하는 것이 최고의 아름다움임을 야나기는 그의 저서에서 수차례 강조한다. 이우환 역시 비워냄에서 오는 아름다움을 논한다. 본고에서는 일본의 미학사에서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야나기 무네요시와 한국을 대표하는 추상화가 이자 설치예술가인 이우환의 예술관 비교를 통해 일상생활에서의 아름다움을 찾는 법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야나기의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에 대해 살펴보기 위해서는 먼저 그가 생각하는 미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그가 상찬하는 미란 게테모노(下手物, げてもの)의 미다. 사전에서 게테모노의 미를 찾아보면 ➀보통의 물건 및 고가의 정교한 물건에 대하여, 일상에서 이용하는 대중적·향토적인 소박한 물품. ↔上手物(じょうてもの). ➁일반과 색다르다고 보여지는 것. 예)-趣味색다른 취미.(広辞苑 第六版 일한사전, 어문학사, 2012, p.1125)로 나와 있다. 일본 대사전에 의하면, 게테모노(下手物げてもの)는 1.인공을 그다지 더하지 않은 조잡한 싼 물건. 게테.↔ 죠테 죠테모노(上手物, じょうてもの).➁일반으로부터 사도(邪道, 도리에 어긋나는 부정한 방법 또는 사악한 가르침, 정식이 아닌 방법), 색다르다고 보이는 것. 기묘한 것으로 설명 되어 있다. 야나기가 의도한 게테모노의 의미는 일상에서 이용하는 대중적 향토적인 물건이라는 의미다. 게테모노의 미라는 개념은 야나기가 작성한 일본민예미술관설립취의서에서 처음으로 나타난다. 그는 취의서 첫머리에서 “자연이 낳은 건강하고, 소박하고, 생생한 미를 구한다면 민예의 세계로 돌아와야 한다. 우리의 선택은 전적인 미를 목표로 한다. 그러므로 가장 생명이 충만하다고 믿는 것만을 수집한다. (중략) 이 미술관은 잡다한 작품의 취집이 아니라 새로운 미의 표적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바이다. (중략) 대개 죠테上手라고 불리는것은 섬약함으로 흐르고 기교에 빠져 병에 걸린다. 이에 반하여 이름 없는 공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게테下手에는 추한 것이 거의 없다"고 밝힌다.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 윌리엄 모리스에 대해 야나기가 행한 비판을 통해 그가 설정한 게테모노의 개념에 대해 알 수 있다.

“그[러스킨]는 항상 중세기의 찬미자였다. 그 시대에는 미가 가장 돈독하게 실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그 시대의 작품을 미술적이라고 봄으로서, 그는 그 시대가 순수공예의 시대였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 세기에는 공예만이 있었지 미술은 없었다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미술적인 작품이라고 간주되는 그 시대의 일체의 것은 용用에서 발생한 것으로서 미 때문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이 성질 이 작품을 그렇게까지 아름답게 했던 것이다." - 「공예의 길」, 1927년 10월, 8P

”본질적이고 치명적인 원인은, 그[모리스]가 아름다운 공예의 미를 알 지 못했다고 하는 것에 귀착한다. 그 자신이 시도하고, 그가 타인에게도 권했던 것은 공예가 아니라 미술이었다. 말하자면 미의식에 기인한 공예이다. 우리들이 탈각脱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그는 시도하려고 했던 것이다. 라파엘 전파라고 칭하고 있으나, 아직 충분히 고딕에 귀의하지는 않고 있다. 이것은 그 파에 속하는 사람들이 주로 미술가여서 공예가는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남은 그의 작품을 보면 그가 공예의 본질적인 미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이것이 그의 길드가 실패한 주원인이다."

- 「공예의 협단에 관한 한 제안」, 1927년 2월, (8-55~56).

마티스의 작품.
마티스의 작품.

아름다움의 절대성

야나기는 용도에 맞게 만들어진 물건인 게테모노야의 자연스러움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더하기나 곱하기 빼기로는 완전한 완벽에 다다를 수 없다는 그의 완벽에 대한 정의에 입각한 주장이다. 타인으로부터도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운 무아의 경지에 다다를 때, 즉 자기 자신마저 사라질때야 아름다움의 절대성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미완성의 것이 완성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함축하는 성질을 지니는 것 역시 게테모노가 상찬의 대상이 되는 이유기도 하다. 아름다움 이란 보는 사람을 상상속으로 끌어들이는 성질을 지니게 된다. 미완성 혹은 불완전성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게테모노의 경우 불완전한 점이 함축성을 제한하지 않아 아름다움의 큰 요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게테모노의 미에 대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관점은 후술할 이우환의 그림에 대한 관점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림이란 일찍이 마티스가 간파 했듯이 무엇을 그린다고 할지라도 그림 일 수밖에 없다. 뛰어난 재능이 있는 화가가 대상을 그대로 정확하게 묘사해서 그린다면 어떨지 한번 상상을 해보자. 아무리 정교한 화가의 솜씨가 곁들여진다 할지라도 묘사 대상이 놓여진 시공간 자체를 완벽하게 묘사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자세히 묘사 할수록 역설적이게도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으로 그림이란 자연답게가 아니라 그림답게 그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그림은 그림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것에 우선하는 그림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화면은 사물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화면 형성의 기호인 것이다. 마티스의 그림이 아름다운 이유는 회화의 벽을 추방해버리고 싱그러운 그림 앞에 자유롭게 서서 감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우환은 이런 묘사의 역설에서 벗어나 정확한 그림을 위해 여백의 미를 중시할 것을 촉구한다.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 하고 캔버스라는 정해진 틀 속에서 신체를 이용하여 반복 작업을 수행함으로서 반복 속의 부정 형태를 나타나게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아이디어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면 아이디어 그 자체가 한계로서 작용한다.

메를로퐁티가 간파했듯이 신체란 나에게만 귀속된 것이 아닌 외계와도 연결된 양의적인 것이다. 지속적 반복 속에서 자기자신을 비워나감으로서 무한과 닿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비움을 통해 잉태되는 완벽함에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점에서 이우환과 야나기는 교차점을 지닌다. 그렇다면 일상속의 아름다움을 느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우환과 야나기는 반복을 통한 선線의 수행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것을 조언한다. 야나기는 형식의 아름다움을 강조한다. 하나의 목적을 완수하기 위해 행해지는 반복 작업들은 불필요한 부분이 점점 탈락되어 필수적인 부분만 결정화 되어 남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형식이 탄생하게 된다. 야나기는 형식을 넘어선 자유로움과 자연스러움을 아름다움으로 삼았다. 이우환 역시 작가가 캔버스에 개입하는 부분을 철저하게 규정해놓았다. 그것을 인간의 내면과 외면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신체를 통해 반복수행 함으로서 본인의 예술세계를 이루었다 즉, 행위의 대상이 한 잔의 차를 내는 것인지, 그림을 그리는 것인지의 차이일 뿐 아름다움의 수행이라는 점은 같은 것이다.

이우환의 작품.
이우환의 작품.

사물의 본질을 보는 눈을 가져야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인간이 의도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 것이기에 일상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는 사물의 본질을 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 그렇다면 바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야나기는 곧바로 보는 방법을 조언 하고 있다. 가격, 희귀함등의 위명에서 벗어나 물건 혹은 행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서부터 바로보기가 성립된다고 본다. 이우환 역시 그림을 감상하는 데에 비슷한 조언을 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세계란 자아를 넘어서서 존재하며 불투명하기에 세계를 대면하는 것은 곧 타자로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에게 있어 작품이란 자기 자신을 최소한으로 한정시켜 최대한 세계와 관계를 맺는 일이다. 작품 보다는 작품이 놓인 공간과 세계가 생생하게 살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그의 방법이다.

그렇기에 그는 작품이란 기호화된 텍스트가 아니라 주장한다. 작품보다는 작품이 놓임으로서 변화하는 공간의 생동감을 작품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논한다. 야나기의 말을 빌려서 말하자면 무엇에 얽메이지 않고 본질을 곧바로 보는 것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것이다. 두 거장은 반복을 통해, 목적성이 없는 비움을 통해 아름다움을 바로보는 연습해야 한다고 한다. 과거의 대명물이나 명물이 만들어지던 시절보다 기술과 교통이 훨씬 발전했으나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아름다움은 숱하게 많을 것이다. 지금 우리 곁을 살펴보자. 우리곁에서 잠자고 있는 대명물이나 명물이 더욱 많을 것이다. 어쩌면 찾아내지 못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 우리시대의 완전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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