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담아낸 허경혜 작가의 나한.
우리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담아낸 허경혜 작가의 나한.

찬 바람이 하늘을 가르자 대충 이어붙인 비닐창문이 덜컥 거린다. 저녁하늘 저편에 새파란 달빛이 대지를 비춘다. 전쟁이라도 난 것일까. 허물어진 담벼락,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있는 콘크리트 조각들 틈사이로 말라깽이 같은 집 두채가 보인다. 오랜 시간 사람이 살지 않은 듯 희미한 불빛조차 없다. 그곳에 먼지투성이 동백꽃이 피어있다. 얼어붙은 땅에 붉은 동백이 나뒹군다. 찬 바람이 부는 그곳에 아무런 움직임도 없다. 오랜 시간 끝에 그 달빛 사이로 언덕을 오르는 사내가 있다. 거친 숨을 몰아쉬던 그 사내는 잠시 멈춰서서 뒤를 돌아본다. 그의 눈에 화려한 세상이 어른거린다. 끝없이 이어지는 차량 행렬, 오색찬란한 네온사인들이 깡마른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물끄러미 그 풍경을 바라보던 그가 다시 등을 돌리고 언덕을 향해 걸어간다. 그의 손에 무언가 들려있다. 가뿐숨을 몰아쉬던 그 사내가 멈춰선 곳은 온기초차 없는 곳이었다. 툇마루에 앉아 손에 들었던 비닐 봉지를 뒤집는다. 달빛에 파란 소주병이 더 차갑게 느껴진다. 그의 눈에 10년전 평화로웠던 마을 풍광이 떠오른다. 서울 한복판 판자촌이었던 이곳은 30여 가구가 오순도순 살고 있었다. 그러다 재개발의 바람이 불며 그 평화는 깨져나갔고, 재개발업자들과 악 다구니속에 사람들은 하나씩 하나씩 이곳을 떠나갔다. 그리고 남은 곳이 바로 그와 또 하나의 집 뿐이다. 그의 눈에는 수없이 많은 집들이 불빛을 반짝이고 있다. 소주를 들이킨 그 사내는 비닐문을 열고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고단한 몸을 차가운 바닥에 눕힌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서울 한복판 이곳에 이런곳이 있다고 누가 믿을 것인가. 아무도 돌아보지 않은 이곳. 나의 소원은 내가 몸을 뉘일 따뜻한 작은공간이다. 누가 나의 소리를 들어줄 것인가. 그는 생각한다. 내일 아침햇살에는 그 누군가가 나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소식을 들고 방문할 것이라고.

소담재 허경혜작가는 흙사람시리즈로 우리시대 잃어버린 가족들의 얼굴을 담아내왔다. 허경혜작가는 자본주의와 디지털에 묻혀버린 우리시대의 다양한 얼굴들을 나한으로 풀어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우리시대 다양한 얼굴을 담은 나한은 우리시대 잃어버린 희망의 등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SNS 기사보내기
소담재 허경혜
저작권자 © 뉴스 차와문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