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둔사의 다승연원도
대둔사의 다승연원도

문헌고찰을 통한 초의차의 전승을 살펴보면 초의차의 전승이 범해로 이어졌다는 분석에는 반론이 없다. 그런데 범해 이후가 문제다. 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논란이 분분하다. 항간에 차문화 잡지를 통해서 이러한 반론은 제기되었다. 이 논지를 크게 다섯 가지로 축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초의와 응송의 계보는 출발부터가 달랐다.
㉯ 범해는 호의의 직계이니 응송을 이을 수 없다.
㉰ 원응은 소요파의 윗대 승려였지 편양파에 속한 범해의 제자가 아니다.
㉱ 원응 계정의 경우 차에 관한 언급을 단 한 줄도 남긴 바 없다.
㉲ 아암 혜장과 초의 의순 두 승려가 거의 같은 시기에 다산초당을 왕래 했으면서도 두 사람의 동선에 겹쳐지는 부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는 편양파가 아닌 소요파여서 응송의 표현대로 찻독 자체가 달랐다. 초의의 법계가 서암에서 상운와 쌍수로 이어진 것은 틀림없는데, 쌍수에서 응송으로의 연결은 어떻게 해도 성립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응송이 어떻게 초의의 법맥을 이을 수 있느냐는 반론이다.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찻독’이란 용어는 응송의 『동다정통고』에서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대흥사에서 차를 만들 당시 약 60여 년 전 대흥사에는 각각 그 문중이 다른 소요파와 편양파가 있었다. 독특한 것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백설당, 대광명전, 천불전 등 그 문중의 살림이 각각 독립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느 문중인가 하는 말은 ‘어느 찻독이냐?라고 했으며, 각 문중마다 제각기 차철이면 제다하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기 제다법에 있어서 정제된 차를 제조하지 못한 것 같다.”는 회고였다. 그리고 대둔사의 제다법을 일괄 정리하고 있다. 이는 차문화 연구가 본격화 되면서 임혜봉에 의해 재정리되었다. “『동다정통고』에 의하면 응송스님이 사미승 생활을 하던 1910년대의 대둔사에는 소요파와 편양파가 같은 절 안에 각각 독립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필자는 통불교적인 서산문도의 탄생에서 대둔사의 <13대 종사>와 <13대 강사>를 검토해 보았다. 그리고 2001년 임혜봉이 발표한 <대둔사 다맥>에서 말하고 있는 <다승연원도>를 비교해 보았다. 아울러 대둔사 승려들의 사승관계에서도 이 문제를 풀어내는 단서를 확보할 수 있다. 『대둔사지』를 종합해 보면 대둔사의 역사와 서산문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편양 언기파의 구분은 없다. 편양 언기 문중이나 소요 태능 문중을 분리하여 거론한 곳은 한 군데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서산문도의 제자 중에 두 명이 크게 번창하니 소요태능과 편양언기이며 수 백년 동안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고 정리되어 있다.

불교 종파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승군 최고 지휘자가 되었던 서산대사(淸虛 休靜, 1520-1604)가 선교양종의 도총섭을 맡음으로써 선종과 교종이 단일 종파로 통폐합된다. 이후 우리나라 불교는 통불교적 一宗이 되는 특색을 지니게 되는데, 이것은 사실 서산대사를 법맥으로 잇는 서산문도의 탄생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후 우리의 불교는 서산문도가 유일 종단으로 그 법맥을 서산 일파에 이어 갔기 때문이다. 이후 1800년에 그려진 선사들의 진영을 통해서 서산문도의 법손 체계도가 완결된 것으로 보여진다.

정민은 편양의 문중과 소요의 문중이 나뉘어져 있고, 초의는 편양 문중이고 응송은 소요 문중이기 때문에 이것을 잇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위에서 밝혔다시피 대둔사의 13대 종사와 13대 강사에서도 편양 문중과 소요 문중이 번갈아 종사와 강사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소요 문중은 심적암에, 편양 문중은 대광명전에 문중 선사의 영정을 따로 모셔 놓고 제사도 각각 지냈다고 한다면 1962년 당시 대광명전을 지키고 있었던 지산 화중의 기록은 어떻게 해석할지가 의문이다. 지산 화중은 소요 문중의 승려였다. 더욱이 지산 화중의 제다법과 당시 대둔사에서 차를 만들었거나 생활했던 시대의 구술자들이 말하는 제다법, 응송의 제다법이 일치하고 있다.

백화사에서 응송스님과 이화중스님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백화사에서 응송스님과 이화중스님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

그리고 현장에서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응송과 지산은 서로의 거처는 달랐지만 백화사에서 같이 공부했던 처지였다. 그리고 범해는 소요 태능의 문중으로서 대둔사 성도암에서 주석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불조종파계보>에서는 범해는 편양언기 문중으로 연결된다. 범해의 법계는 -淸虛 休靜-鞭羊 彦機-楓潭 義諶-月潭 雪霽-喚醒 志安-虎巖 體淨-蓮潭 有一-白蓮 禱衍-縞衣 始悟-梵海 覺岸이다.

현장에서 입수한 불조종파계보와 현세문손개별파계보 합본
현장에서 입수한 불조종파계보와 현세문손개별파계보 합본

㉯-범해는 호의의 직계이니 응송을 이을 수 없다는 견해는 기 발표된 논문에서 살펴볼 수 있다.“응송이 출가한 당시(1911년) 대둔사에는 초의의 제자 범해가 열반한 지 겨우 10여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 따라서 범해의 제자인 원응은 대흥사에서 강학하며 후학을 기르고 있었고, 바로 이 원응이 응송에게 사교를 가르쳐준 법사였다는 점, 그러므로 응송의 다법은 혼란한 시대적 상황에서도 초의의 제자들에 의해 이어진 것으로, 이는 초의로부터 연원된 것”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범해는 원래 차에 밝았던 호의 시오(縞衣 始悟, 1778~1868)의 법제자였지만 초의에게서 대승계를 받았기에 초의의 대승계 제자로 분류한다.

따라서 응송에게 사교를 가르친 원응이 범해의 제자라는 점에서 초의의 다법은 응송에게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 박동춘의 논지이다. 원응은 19세기 불교계의 대표적 인물인 초의의 다맥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원응은 소요의 3대손인 화악 문신(華岳 文信, 1629- 1707년)의 8대손으로 범해의 참학에 참여한다. 보제(普濟), 범해(梵海), 연주(蓮舟), 응화(應化), 월화(月華)는 5대 강사로 뛰어난 이였으며, 1894년 『동사열전』편찬 당시 심적암에 주석하고 있었다. 이것은 범해의 『동사열전』<圓應講伯傳>에서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원응은 초의의 『선문사변만어』를 간행하고 그 서문을 쓰기도 하였고, 초의의 시집을 발간하여 발문을 쓰기도 했다. 응송이 초의의 <동다송>을 널리 선양하고 차에 대해 깊은 식견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원응에게서 강학을 전수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다맥을 전수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지상권임대계약서, 주지 응명, 총무 이 지준, 재무 이화중
지상권임대계약서, 주지 응명, 총무 이 지준, 재무 이화중

㉰-또한 원응은 소요파의 윗대 승려였지 편양파에 속한 범해의 제자가 아니다. 그래서 응송을 이을 수 없다는 논거 역시 매우 불안한 제시이다. 편양 문중과 소요 문중이 다른 솥단지이기 때문에 연결할 수 없다는 논리로 초의와 응송을 이을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는 이 논지가 성립할 수 없다. 정민이 위에서 제시한 이유 즉 양 문중의 근거를 적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 하면 원응과 응송이 소요 문중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원응의 법제자는 응명 학민(應溟 學民)이다. 응송은 불교분쟁으로 대둔사에서 쫓겨나 대둔사 아래 장춘마을 사하촌에 백화사라는 집을 짓고 살았다. 당시 대둔사의 주지가 원응의 제자인 응명이었다. 두 사람이 사하촌 건립을 위해 <지상임대계약서>를 체결하였는데 당시의 서류가 이를 증명한다.

원응과 응명의 법계는 淸虛 休靜-逍遙 太能-海運 敬悅, 醉如 三愚-華嶽 文信-雪峰 懷淨-珍峯 深宇-明眞 再嚴-萬虛 頣陟-龍波 永暄-雲坡 益化-東化 敬雲-圓應 戒定-應溟 學敏-璟龍 鍾煥으로 이어진다. 원응의 제자가 응명으로 법계로나 법명의 항렬으로나 응송과 응명이 佛籍․僧籍으로 형제간은 아닌가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정민은 응송이 소요 문중에 속한 승려로 연파 혜장에서 수룡색성으로 이어진 법맥을 전수 받았다고 한다. 이 법맥의 연결은 더욱 상세하게 해석된다. 연파는 연담과 운담을 찾아가 공부를 하였고 수룡은 그 스승의 영향을 받아 운담시문을 공부한 승가의 역사를『대둔사지』에 반영하였다. 『대둔사지』는 1823년에 玩虎 倫右가 鑒定하고, 兒菴 惠藏 留授한 책이다. 袖龍 賾性과 草衣 意恂이 編輯하였으며, 騎魚 慈弘과 縞衣 始悟가 校正하였다.

혜장은 12대 강사이며 범해는 13대 강사이다. 강단의 대를 이었다. 더욱이 연담은 12대 종사이고, 초의는 13대 종사로 종단의 대를 이었다. 연담은 초의의 스승이다. 그런데 연파는 불서를 널리 배우고 연담과 운담 정일을 찾아가 배웠다. 연담은 편양 문중이고 운담은 소요 문중이다. 연파 혜장은 응송과 마찬가지로 소요 문중의 승려다. 특히 완호 윤우는 열일곱 살 나던 해에 구족계를 받은 뒤 백련 법사에서 교학을 익히고 연담으로부터 선학을 배웠다. 완호는 뒷날 백련법사의 법을 이어받는다. 그리고 순조 12년(1812)봄 호의가 입실하여 향을 사르고 완호의 법을 잇는 법제자가 되었다. 완호는 훌륭한 제자들이 많았다. 덕행에는 성묵, 호의, 하의이고 언변에는 환봉, 중화, 영서, 정사에는 설암, 치암이고, 문학에는 화담, 초의로 이어진다.

이것을 맥으로 정리하면 연담-완호-치암․호의, 연담-연파, 초의로 이어진다. 여기에서 범해는 초의를 비구 및 보살계사로 삼고, 호의 시오를 전법자로 삼았다. 호의, 하의, 초의, 문암, 운거, 응화 6법사에게 수행한 그는 요옹 이병원에게 유가경전을 전수받으니 경율론 삼장에 정통하고 유교 천도교 기타 각종 내외학문에 능통하여 학자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래서 조선 후기 다맥의 집중이 범해로 집적되고 있는 것이다. 『대둔사지』는 처음 기술부터 편양 문중이라는 것은 없다. 큰 맥으로 말하면 완호 윤우 다음으로 대둔사 강사는 모두 소요 문중이었다. 연파-범해-원응-응송까지, 여기까지가 편양 문중과 소요 문중의 계파 분류 없이 사승관계를 정리한 틀이다. 이 논거와 분석은 임혜봉과 이병삼이 동일하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범해의 <茶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민은 스스로 <茶歌>에 등장하는 승려들을 하나하나 꼽아 당대의 성대하게 퍼진 차문화의 실상을 증언했다. 中孚․离峯․無爲․禮庵․南坡․靈湖․霽山․彦銍․聖學․太蓮이 당대의 승려들이다. 모두 초의 이후 그 법맥을 이은 제자들이라고 하였다. 모두 차치하고 이들 승려들만 분석해도 아주 재미있는 僧籍들이 나온다. 더욱이 이들이 모두 편양파 승려들도 아니다. 남파 복율(南坡 伏律)은 소요파 문중으로 풍암의 제자다. 南坡 伏律의 법계는 -淸虛 休靜-逍遙 太能-海運 敬悅, 醉如 三愚-華嶽 文信-雪峰 懷淨-松坡 覺喧-晶巖 卽圓-蓮坡 惠藏-袖龍 賾性-鐵船 惠楫-豊庵 宜礼-南坡 伏律이다. 이 법계는 八紘 寬洪과도 같다. 그래서 南坡 伏律과 팔굉 관홍(八紘 寬洪, 1824~1894)은 형제간이라는 기록이 보이는 것이다. 응송의 법계와 비교하면 豊庵 宜礼에서 갈라진다. 化月 敍葒-惠菴 普惠-應松 暎熙로 이어진다.

정민의 주장대로 혜장-색성으로 이어지는 다맥으로 응송을 연결한다면 연담과 완호의 관계, 완호와 초의․연파의 관계, 연담과 연파의 관계, 연담과 초의의 관계, 연파와 초의의 관계를 다 끊어야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초의와 범해도 자동적으로 끊어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정민의 찻독론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다만 어느 문중인가? 어디 찻독인가?는 상호 고리를 분리하기 위함이 아니라 동질감이나 소통의 언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네 번째 오류다. 원응계정의 경우 차에 관한 언급을 단 한 줄도 남긴 바 없고 그가 차를 만들었다는 근거 또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단정은 자료 검토가 매우 미흡한 것으로 드러났다. 승려들의 차문화사에서 보이는 차시이다. 더욱이 이것은 금명의 기록에서 발견되었다.

금명 보정(錦溟 寶鼎, 1861~1930)
허원응이 마련한 차회에 참석하여
赴許圓應茶會

碧山雨霽日如年 청산에 비 개자 하루가 일 년 같은데
隨柳攀松近午天 버들 길 오솔길 걷다 보니 한낮이 되었네.
風起南陽龍睡穩 남양에서 바람 불어 낮잠이 달고
花開陳榻客蹤連 진탑에 꽃이 피어 방문객 줄을 잇네.
茶竈香傳傾石髓 다조에선 향기로운 차를 따라 마시고
詩筵夢罷駕雲船 시연에선 구름타고 놀던 꿈 깨었어라.
滿堂蒲塞兼紅露 불당에 가득한 남녀 불제자들의
七斤霞衫濕翠烟 일곱 근 장삼에 노을이 물든다.

발굴된 승려들의 문집이나 자서전, 그리고 茶詩들에서 근거할만한 자료는 상당하다. 이 차시에서도 살펴볼 수 있지만 금명과 원응은 동시대를 풍미한 친근하고 고상한 벗이었다.(우어 성호, 보정, 원기, 파일, 기운, 세영, 칠처고붕-友於 誠浩, 寶鼎, 贊儀, 元奇, 化一, 奇雲, 世英, 七處高朋) 이것은 범해의 『동사열전』<圓應講伯傳>에서 확인된다. 그래서 위 차시에서 보이듯이 금명이 원응의 차회에도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둔사지』편찬 내력
『대둔사지』편찬 내력

㉲-그의 글 말미에서 밝히고 있는 말이다. “아암 혜장과 초의 의순 두 승려가 거의 같은 시기에 다산초당을 왕래 했으면서도 두 사람의 동선에 겹쳐지는 부분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점”이라고 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단정이다. 1823년에 편찬된 『대둔사지』는 이들의 정황을 밝혀준다. 『대둔사지』는 대둔사의 역사와 史籍을 기록하고 대둔사에 관한 가장 상세하고 종합적인 기록이다. 당시 玩虎 倫右 鑒定, 兒菴 惠藏 留授, 袖龍 賾性․草衣 意恂 編輯, 騎魚 慈弘․縞衣 始悟 校正하여 편찬한 책이다. 천년사를 정리하고 대둔사의 역사를 편찬하면서 이 두 선사(아암 혜장과 초의 의순)의 동선이 겹쳐지지 않는다는 매우 섣부른 단정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대둔사지』를 편집하는 과정은 여실히 드러난다. 서로가 문헌을 해석하고 기억을 돕는 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데 각자가 문집을 해석하는 과정에서의 설명도 덧붙이고 있다. ‘연담 문집은 완호가 수정을 하였다.’ 등등 이들이 방대한 대둔사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갖게 된 모든 회의나 의견교환 등 상정 과정을 유추해 본다면 더 많은 회합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다.

임혜봉은 “조선 후기 우리나라 다풍을 중흥시킨 초의 선사의 법맥은 편양-풍담-월담-환성-호암-연담-초의-서암 선기-쌍수 일한-응송 영희-청량 백운으로 이어졌다. 단지 대둔사의 음다풍 전통이 끓어지지 않고 이어져 왔음을 뜻할 뿐이다. 따라서 대둔사의 다맥은 선맥, 법맥, 계맥 등이 전수된 것과는 엄격히 구분해서 생각해야 한다. 광복 후 대둔사의 다맥은 응송스님의 다맥을 이은 청량백운과 제자 박동춘에 의해 이어졌는데 무엇보다 일지암의 복원은 대둔사 다맥의 계승이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 확실하게는 대둔사의 제8대 대종사까지 편양 언기계와 소요 태능계가 서로 번갈아 가면서 대종사의 법맥을 계승하였다. 이것은 대둔사 13대 종사표를 분석하면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서산대사의 두 법손들은 대둔사와 만덕사를 중심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서 조선 후기 서산 문중의 법맥을 이끌었다. 조선 후기로 들어와서는 사찰의 선맥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의발상좌나 법계로 다맥을 풀 수는 없다. 더욱이 다맥은 사자상승하듯이 다풍을 이어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찰에서의 다풍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기 때문에 다맥이 끊어진 것은 더더욱 아니다. 다풍은 사찰풍속으로 보아야 맞다. 사찰에서는 선대의 어록을 가지고 공부해도 사자상승한 것으로 인정하여 위폐상좌라는 말로 제자임을 인정하는 풍속도 존재한다.

더욱이 일제강점기를 거쳐 근․현대로 이어지면서 부자(夫子)가 양 문중으로 나누어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불조종파계보>를 통해서도 분석이 가능하다. 대둔사의 승려이자 탱화장이었던 낭월(浪月)은 응송의 법제자로 소요 문중이다. 법명은 무영 재섭(無影 在燮)으로 화승이었다. 그런데 그의 夫는 초우 상선(初雨 祥善), 편양 언기 문중이다. 또 낭월의 부 초우의 은사는 예암 광준(禮菴 廣俊, 1834~1894)이다. 예암은 차를 즐기는 대둔사 승려로 범해의 <차가>에도 나온다.
 

범해 각안의 <茶歌>에 나오는 禮庵 廣俊(예암 광준)스님의 진영, 옛 법대로 차를 잘 보관한 스님
범해 각안의 <茶歌>에 나오는 禮庵 廣俊(예암 광준)스님의 진영, 옛 법대로 차를 잘 보관한 스님

이번 현장조사에서 더 독특한 것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대둔사에는 통혼권도 보인다. 현장조사에서 밝힌 芝山 化仲은 소요 태능 문중이었으나 편양 언기 문중인 육봉 법한(六峯 法翰, 1867 정묘생~1942년 갑신년 6월 1일 입적)의 사위(壻)가 되기도 한다. 육봉은 『대둔사지』에 대둔사 8創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당시 대둔사의 상황은 양 파가 엄격하게 구분되었던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계로 찻독론을 단정할 수는 없다. 충분한 개연성을 두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육봉의 딸 말하자면 지산의 미망인은 법명이 萬法心(金德心, 1922~ 임술생, 95세)으로 『대둔사지』 번역본에 협조자로 역할을 담당하였다.

다맥 전승에 대한 필자의 논지를 정리한다. 지금처럼 다채널매체로 강연이나 강학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던 것도 아닌 시대에서 화엄법회나 강(학)회가 열리거나 하면 천리만리도 찾아갔던 것이 사원의 역사이기도 하다. 예컨대 금명이 범해를 찾아가 차법을 배운 것이 그것이다. 다송자(금명)는 일찍이 대둔사에 초의의 차법을 계승한 범해를 찾아가 배운다. 다송자가 『백열록』에 <차약설>을 남긴 것도 이런 연유에서 비롯된 승가의 향학열 때문이었다. 금명이 범해에게 받은 영향은 『백열록』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초의가 쓴 <동다송>을 초록해 둘 정도로 초의를 흠모했음을 그의 글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역사적 행보가 대둔사 다풍이 범해로부터 원응과 금명으로 이어지게 한 일례(一例)인 것이다.
 

광무4년 대둔사 대웅전 중창보수 때 화주 육봉스님의 석문기록
광무4년 대둔사 대웅전 중창보수 때 화주 육봉스님의 석문기록

필자의 논문「근․현대 차문화 부흥기 應松 朴暎熙의 역할과 영향」에서 거론하고 있는 다맥은 이런 맥락을 정리한 것이다. 이 글에서 야기되는 응송, 원응, 초의 일계와 범해의 종파정리는 다음과 같다. 이것은 필자가 가지고 있는 자료 <佛祖宗派系譜>에서도 일치한다.

-淸虛 休靜-逍遙 太能-海運 敬悅, 醉如 三愚-華嶽 文信-雪峰 懷淨-松坡 覺喧-晶巖 卽圓-蓮坡 惠藏-袖龍 賾性-化月 敍葒-惠菴 普惠-應松 暎熙

-淸虛 休靜-逍遙 太能-海運 敬悅, 醉如 三愚-華嶽 文信-雪峰 懷淨-珍峯 深宇-明眞 再嚴-萬虛 頣陟-龍波 永暄-雲坡 益化-東化 敬雲-圓應 戒定-應溟 學敏-璟龍 鍾煥

-淸虛 休靜-鞭羊 彦機-楓潭 義諶-月潭 雪霽-喚醒 志安-虎巖 體淨-蓮潭 有一-白蓮 禱衍-翫虎 倫佑-草衣 意恂-恕庵 善機-雙修 一閒-光德 千件

-淸虛 休靜-鞭羊 彦機-楓潭 義諶-月潭 雪霽-喚醒 志安-虎巖 體淨-蓮潭 有一-白蓮 禱衍-痴庵 贊隱-普海 指永-皓月 寬札-印潭 能悟

-淸虛 休靜-鞭羊 彦機-楓潭 義諶-月潭 雪霽-喚醒 志安-虎巖 體淨-蓮潭 有一-白蓮 禱衍-縞衣 始悟-梵海 覺岸

 필자가 확인하고 있는 자료 『대둔사지』와『대둔사의 역사와 문화』에서는 “대둔사는 국가로부터 사액을 받음으로써 이제 부근에 있는 천태종찰의 전통을 지닌 선암사나 조계종찰의 전통을 지녀 승보종찰로 격상된 송광사와 당당하게 사격을 겨룰 만큼 그 지위가 향상되었다. 이때 종풍을 드날리던 대종사가 연담 유일, 초의 의순이고, 대강사는 금주 복혜, 완호 윤우, 낭암 시연, 연파 혜장, 범해 각안 등이었다. 이 글에서는 수룡 색성(袖龍 賾性, 1777~)과 다산의 왕래를 드러내고 있고 다산과 혜장의 왕래는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서 밝혀졌다.
 

더구나 수룡 색성은 그가 맥으로 이을 수 없다는 소요의 문도이고 아암 혜장의 제자이기도 하다. 위에서 밝히고 있는 계맥에서 확인되듯이 응송 영희는 아암 혜장의 법계이고 소요 태능파에 속한 문도이다. 사찰의 계맥과 다맥을 종합적으로 해결하기에는 여러모로 난제들이 보인다. 필자는 이러한 <불조종파계보>로 다풍이나 다맥을 아우를 수는 없다고 사료된다. 다풍은 사찰의 유풍으로 전해진다. 그러한 다풍이 대둔사에 현재까지도 남아 있고 이것이 초의차의 근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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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인문학부 연구전임교수 정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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