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가 지금까지 인터뷰 형식으로 구성한 책으로는 옴진리교 사건을 취재한 논픽션 『언더그라운드』를 비롯해 평론가 가와이 하야오와의 대담집 『하루키, 하야오를 만나러 가다』, 지휘자 오자와 세이지를 인터뷰한 『오자와 세이지 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등이 있지만, 질문을 받는 인터뷰이 입장에서 장시간에 걸친 대화 내용을 단행본으로 묶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평소 공식석상과 대중매체에 거의 등장하지 않아 신비주의라는 말까지 듣는 그로서는 이례적인 일이다. 원래 단발성으로 끝날 예정이었던 잡지 인터뷰가 총 네 차례로 이어지고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기까지는 인터뷰어 가와카미 미에코의 역할이 컸다. 파격적인 문체로 생생한 여성성을 그려낸 소설 『젖과 알』로 2008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일본 문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진 가와카미 미에코는 가수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에 더해 배우와 방송인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엔터테이너이자 시인으로도 인정받은 작가다.

최근 한국과 일본에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른 젠더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며 지난 5월 옥천에서 열린 정지용국제문학포럼에서는 문학작품 속 페미니즘적 관점에 대한 발제와 토론을 맡기도 했다. 십대 시절부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즐겨 읽으며 독자로서, 작가로서 큰 영향을 받아왔다는 가와카미 미에코는 때로는 동경 어린 시선으로, 때로는 날카로운 지적이 담긴 질문으로 대화를 이끌어간다. 애정과 존경에 기반한 인터뷰어의 질문에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전에 없이 솔직하고 신선한 대답을 내놓으면서 소소한 일상 속 에피소드부터 소설에 대한 철학까지 폭넓게 아우르는 대담집이 완성되었다.

1장 「뛰어난 퍼커션 연주자는 가장 중요한 음을 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첫 대담은 2015년, 글쓰기에 대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회와 철학이 담긴 에세이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출간된 직후 이뤄졌다. 고등학생 시절 고베에서 열린 그의 낭독회에 참석해 사인까지 받았다는 일화를 앞서 밝힌 가와카미 미에코는 최근 작품에서 드러나는 문체적 변화를 중심으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세계를 폭넓게 훑어나간다. 등장인물을 비현실적 공간으로 이끄는 ‘벽 뚫고 나가기’, 외부에서 접한 소재를 작가의 내면에서 한번 걸러내는 ‘담갔다 건지기’ 등의 글쓰기 기술을 비롯해, 데뷔 당시 일본 문단의 상황과 현재 작가들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역할에 대한 생각을 전공투 세대의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한다.

2장 「지하 2층에서 일어나는 일」 2017년 출간된 장편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의 구상 과정, 화자의 위치와 선악구도 등의 변화에 주목하며 작가 대 작가로 흥미로운 대화를 이어나간다. 작가의 이름만 보고 책을 사주는 독자와 일종의 신용관계가 형성한다는 것, 소설을 쓰고 읽기 위해 거쳐야 하는 무의식의 세계를 단독주택의 ‘지하 2층’에 비유할 수 있다는 해석이 참신하고도 알기 쉽게 와닿는다.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했을 법한, ‘이데아’와 ‘메타포’가 대체 무슨 뜻이냐는 질문에 대한 뜻밖의 답변도 확인할 수 있다.

3장 「잠 못 이루는 밤은 뚱뚱한 우편배달부만큼 드물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꾸준히 존경과 애착을 보여온 작가, 스콧 피츠제럴드와 레이먼드 챈들러에게서 배운 문장 쓰기와 인물 조형 방식의 핵심을 밝힌다. 읽는 이의 흥미를 유발하는 재치 있는 비유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개성적인 문체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엿볼 수 있다. 작가의 성별에 따라 문체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다는 지적과 함께, 소설 속 여성 캐릭터가 너무 성적으로만 소모된다는 비판을 대변하는 가와카미 미에코의 질문이 특히 인상적이다. 나아가 그간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 등장했던 여러 타입의 여성들을 재조명해본다.

4장 「설령 종이가 없어져도 인간은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마지막 인터뷰에서는 『기사단장 죽이기』의 시간별 작업 과정을 상세히 살펴보며 전업작가로서 매일 꾸준히 글을 써나간다는 것의 의미를 논한다. 또한 출판업계에서 지니는 국제적인 영향력을 ‘무라카미 인더스트리즈’라고 표현하며 전 세계에 작품이 번역 출판되는 소감, 현실 문제에 대해 소설이 할 수 있는 역할, SNS 시대에 생각하는 이야기의 본질 등에 대해 보다 깊은 대화를 나눈다. “예전에 쓴 글은 다시 읽지 못한다”는 솔직한 발언의 이면에서, 무라카미 하루키가 사십 년 가까이 쉬지 않고 달려오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만들어온 작가임을 새삼 느낄 수 있다. 문학동네. 값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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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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