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고2라서 요즘은 가족들끼리 시간 맞추기가 영 쉽지 않습니다. 고 3이 되면 더 시간 내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얼마전에 함께 대만에 다녀왔는데요. 이번 여행은 정말 가족들하고만 보내야지 하는 생각으로 갔었는데...

결국은 또 찻집에 가고 말았습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철없는 아빠지만 행복한 차인이었던 그날을 회상하며 시작해봅니다. 지난번 대만 여행때 못 가본 찻집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중에서 <기고당奇古堂>이라는 이곳은 한국 사람들의 평이 그다지 좋은 곳은 아니었던걸로 기억합니다.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이라는 평이 대체적이었죠.

1g의 찻잎만으로 차를 우린다는 애기에 혹해서 찾아가긴 했지만 86세의 주인장이 무척이나 깐깐하다는 소문이 있어 큰 기대는 없었지요. 찻집 내부는 아주 소박하고 작았습니다. 기물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고, 특별할게 없는 평범하고 흔한 대만 찻집의 모습이었어요. 할아버지 주인장께서 직접 차를 우려 주신다고 들었는데 이날은 할머니께서 해주시더군요.영어에 서툰 저와 두분이 함께 앉아 멀뚱히 차를 우려 마시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어찌나 어색한지 금방 마시고 일어나야겠다 싶었습니다. 그랬던 이곳에서 결국 4시간이나 있고 말았지만요.차호가 가득 찰 만큼 넉넉히 찻잎을 담아 우리는 모습에 익숙한 저로서는 정말로 딱 1g의 찻잎을 저울에 달아 계량한뒤 차를 우려주시는 모습이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차호도 이에 걸맞게 아주 조그마하더라고요. 길쭉하게 생긴 문향배를 거쳐 하얀 찻잔으로 차가 옮겨지고...

문향배에 차를 먼저 담고 찻잔에 차를 옮겨서 따른 후, 문향배의 차향을 먼저 느낍니다. 허리를 펴고, 코에 잔을 대고 코로 천천히 향을 들이마시고, 입으로 내쉬면서...

향이 너무 좋을 때는 5분이고 10분이고 향만 맡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차를 마시죠. 주인장이 설명하기를 혼자 마실 때는 1g의 찻잎을 가지고도 하루 종일 마신다고 합니다. 찻잎에 남은 마지막 향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그렇게 종일 1g의 차를 즐기다 보면 또 거기서 나름의 깊이를 찾을 수 있다고 하셨지요. 이런방식을 기본으로하여 보통은 4가지 종류의 차를 한 세트로 구성하여 마시는데 그 프로세스가 잘 정리된 한 장의 종이를 내어주십니다. 저렴한 차부터 비싼 차 순으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핵심 내용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1. 동정오룡 1g

2. 산림계 0.8g

3. 리산오룡 0.6g

4대우령 0.5g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0.2g씩 줄여가며 마시는 건데요. 아주 작은 양이지만 각 차의 맛과 향을 즐기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런방법으로 차를 더 잘기기 위해 기물들도 직접 디자인 하셨다고 하더군요. 크기는 작지만 아주 잘 만들어진 자사호였습니다. 찻잔이 얇을수록 향도 잘나고 섬세하게 맛도 음미할 수 있는데 디자인하셨다는 잔들 역시 아주 얇고 격이 있었지요. 이렇게 한 세트로 만들어 판매도 하시고요.옛 앨범속 사진들을 하나씩 꺼내 보여주시기도 했는데요. 강의를 하거나 차회를 진행하셨던 모습들이 아주 좋아 보였습니다.

한 평생 이렇게 차를 마시면서 자신만의 방법을 창시하고 전파하는 경지에 이른 분이니, 좀 더 배워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지더군요. 이 찻집은 365일 쉬는 날이 없다고 합니다. 하루 14시간씩 꼬박 하루도 쉬지 안호 86세가 되실 때까지 40년동안 이 자리를 지키셨다고요. 저 나이가 되도록 건강하게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이런 방식을 차를 마셨왔기 때문이라는 말씀에... 제가 원하던 것을 찾은 기분이 들었지요. 처음엔 자연을 너무 빠르고 쉽게 소비하는 것이 안타까운 마음에 조금씩 아껴 차를 드시기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점차 1g의 차에서 느껴지는 섬세한 맛을 즐기게 되셨다고요. 환경과 자연을 위해서라도 인간은 아끼고 절약하는 것에 대해 더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하시는 모습에 무척 감명을 받았습니다.

적은 양을 우려먹는 만큼 당연히 경제적이기도 합니다. 친환경적이고 싸고 건강에도 좋으니 그 장점은 더 나열할 필요하 없을 정도였죠. 그런데 정말 놀라웠던 건 그 맛이었습니다. 이렇게 적은 양의 차를 우려서 마시는 경험은 처음이었는데 한 가득 찻잎을 채워 마시는 차에 비해 결코 맛과 향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정말이지 너무나 맛있고 부드러웠습니다. 보통 차를 마실 때는 세차라 하여 첫잔을 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지요. 찻잎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하는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는 세차를 하지 않습니다. 의아한 마음에 이유를 물어보니 어차피 말려 있는 차를 세차해봤자, 겉 먼지만 털어내는 것일 뿐 안에 있는 것들을 씻어낼 수 없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러니 세차하는 것은 그저 낭비에 불과하다...그렇게 주먹을 말린 찻잎에 비유해가며 열심히 설명을 해주시더군요. 듣고보니 다 맞는 말씀입니다.

차구 세트를 하나 샀더니 쓰시던 자사호도 하나 선물로 주셨습니다. 너무 예쁘지 않나요. 이건 금이 깨져서 금이 간 받침인데 달라고 졸랐더니 웃으며 흔쾌히 가져가라고 하셔서 받았고요. 종이 뒷면에 사인도 한 장 받았습니다. 김동현 선생님을 뵈러 <운중월>에 갔을 때도 그렇고, 90을 바라보고 계신 <기고당>의 정정한 주인장을 뵙고 나니... 그 나이가 된 제 모습을 자꾸 상상하게 됩니다.

언젠가는 저에게도 다가올 노년의 차 생활이기에 그 나이의 어른들은 어떻게 차를 드시는지 늘 궁금한데요. 제가 운이 좋은 것인지 만나 뵌 어르신들이 하나 같이 참으로 멋진 차인의 삶을 살아가고 계신 것 같습니다. 세월과 함께 쌓인 기품과 철학이 있어 그 안에 무한의 배울 점들의 존재합니다. 무엇보다 <기고당>에서 좋았던 점은 차를 진하게 먹지 않는 제 스타일과 너무 잘 맞았다는 것이었죠. 섬세하고 건강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방법. 그 하나를 터득한 것 만으로도 충분히 저에게는 가치가 있었습니다.

만약 5년전에 이 집을 갔더라면 별거 아니라고 하고 그냥 나왔을지도 모르겠어요. 기물도 별로 없고 차도 그냥 그렇고... 이상한 방법으로 차를 마시네, 하고는 30분 정도 있다가 흥미를 잃고 나와버렸겠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이분의 패러다임을 이해할 수 있는 지금의 나이와 상황이 되어서야 인연이 닿은 것 또한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가르침을 얻는데에는 다 적절한 때가 있는 법인가 봅니다. 대만은 두 번 다시 갈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찻집 때문에 또 한번은 꼭 가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고당>의 주인장께서 90살, 100살까지... 오래 오래 계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건강하시지만 연세가 있으시니 앞으로 또 뵐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니까 마음이 괜스렌 복잡해집니다.

지금이 아니었으면 평생 못 배울 수도 있었던 것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더욱 귀하고 감사하게 느껴지네요. 아쉬운 마음으로 돌아서는데 문밖까지 나와 활짝 웃음 배웅을 해주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카메라에 담아보았습니다. 두분의 배웅이 유독 더 다뜻하게 느껴졌던 것은 깐깐하다는 소문에 조금이나마 선입견을 가졌던 걸 후회했던 탓이겠지요. 그들에겐 반복되는 일상의 단편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저에게는 참 감사하고 행복한 경험이었습니다.

How to make tea? (차를 어떻게 만들래)가 아니라, How to drink tea?(차를 어떻게 마실래)를 배우고 싶다면 한번쯤 꼭 가볼 만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다리고 두손으로 따르고 몇분간 우리고...

어떻게 차를 만드는지도 <다도>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방식들이 전해 내려져옵니다. 그런데 How to drink tea에 대해서는 배운 게 많지 않지요. 어떻게 보면 다 아는 것이고,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던 것들이었는데 이렇게 하나씩 꼼꼼히 배워본 적도 처음이었고, 단 몇 줄이라 할지라도 자기만의 이론을 가지고 계신분도 처음이었어요. 불교의 가르침을 얻었으면 나누어 가르치는 것을 선업이라고 한다지요. 나누주셔서 감사하고 나도 앞으로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더불어 해봅니다.

차가 있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가능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내가 차를 사랑하고 차와 함께 하게 된 것은 운명이구나,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하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밤입니다. 그날의 추억에 하염없이 잠겨 글을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대만에서의 짧은 일정동안 본의 아니게 좋은 찻집을 두 번이나 가게 되었는데 그 두 번째 이야기도 조만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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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연한의원 임형택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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