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조선 차문화사의 향차문화 전승과 미래가치

향차는 고려말엽인 1200년부터 1400년경까지 문헌에 나타나는데, 충렬왕 18년(1292)에는 원나라에 예물로 보내기도 했던 고급단차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원나라에 귀화한 고려인의 후손으로 요양행성평장정사遼陽行省平章政事인 홍군상洪君祥이 원나라로 돌아갈 때 고려의 홍선洪詵장군을 원나라에 함께 보내어 향차香茶와 목과木果(모과)등을 바쳤다. 진감국사眞覺國師는 ‘정신이 가물가물하여 잠 이룰까 두려우니, 향차香茶를 부지런히 끓여야겠네’라고 했고, 이규보李奎報도 ‘일곱 잔의 향차香茶는 겨드랑이에서 바람을 일으킨다’고 했다. 조선 초에도 향차香茶를 볼 수 있다.

향차를 만드는 법은 1330년에 지은 원나라의 󰡔음선정요飮膳正要󰡕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참고하면, 향차는 차와 여러 가지 향기 나는 약재를 갈아 멥쌀로 쑨 죽과 섞어 떡 모양으로 박아낸 단차였던 것 같다. 만드는 방법이 번거롭고 잎차가 성행됨에 따라 계승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향기로운 차를 뜻할 때는 방차芳茶․ 방명芳茗이란 말을 썼으며 향차香茶라고 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정황은 부풍향차가 단차(떡차)가 아니었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제법에서 차의 제다법이 아니라 차에 향약재를 가미하는 단계의 제다법만 남은 상황에서 떡차로 단정하는 것은 부풍향차의 특수성이나 다양성을 배제할 우려가 짙다.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차인이었던 변계량卞季良(1369~1430)이 남긴 시에도 향차香茶가 보인다. <西京使相容軒李公惠石銚以詩答之ㅡ서경사인 상용헌 이공이 주신 돌남비에 시詩로써 화답하다>라는 시詩인데, ‘향차활화팽산천香茶活火煮山泉 불꽃이 솟는 불과 산의 샘물로 향차香茶를 달여서 일완재경골욕선一椀才傾骨欲仙 한 주발에 조금 기울이니 몸은 신선이 될 것 같네.’라고 읊고 있다. 향차는 1292년보다 200년 전인《동문선》에 기록이 남아 있는데, 고려 문종(1046~1089) 때 혜소국사(慧炤國師, 972~1054)에게 드리는 제문에 향차가 등장한다. ‘모년 모월 모일 계족산 정혜사 사문은 삼가 향차와 서수의 전으로서 공경히 당산개창 시 혜소국사 영령에 제사 드리나이다.’라고 되어 있다.

약용차란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차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차는 음료이기 이전에 오랜 기간 질병을 치료하는 약재로 이용되었으며, 그 이유는 차가 가지는 성분의 대부분이 건강에 유익하고 독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오랜 기간 동안 널리 이용되었던 약용차의 문화가 창의적으로 계승되지 못한 것은 차를 이용하는 다양한 문화가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차문화를 연구함에 있어 음차飮茶와 다례茶禮 위주의 문화만이 중요시되어 왔기 때문이다.

약용의 차는 탕湯, 환丸․고膏, 차음茶飮 등 다양한 형태로 질병치료로 이용되었다. 차 처방 이외에도, 필요에 따라 단방單方 약물 한두 가지를 달여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개별 약물 뒤에 ‘煎湯’, ‘煎’을 붙여서 칭하였다.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 확인되는 차는 중요한 치료수단의 하나로서, 가벼운 질환을 다스리거나 湯劑의 효과를 보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차음茶飮을 달여 올리는 방식에는 湯劑와 마찬가지로 劑入과 煎入이 있는데, 이는 왕의 하교에 따라 정하였다. 이렇듯 󰡔승정원일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향약을 중심으로 하는 많은 의서들이 발간․보급되었고, 이러한 의서의 보급은 약용차의 보급에도 기여하였다. 당시 약용차는 환, 가루, 탕 등 매우 다양한 형태로 이용되었다. 처방 부위로는 내용內用과 외용外用에 모두 쓰였고, 특히 일상에서 자주 발생하는 감기나 체증, 두통, 설사 등의 질병에 주로 처방되었다. 또한 단방으로 처방되는 경우도 다수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응급처치용으로도 많이 이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은 약용차가 왕실뿐만 아니라 일반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이용된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의서들은 일반백성들도 쉽게 활용할 수 있도록 향약중심으로 편찬되었다. 특히 향약의 하나인 차는 감기나 두통, 체기, 열병, 중독 등 일상생활에서 자주 일어나는 질병에 이용되었고, 또 단방으로 처방되는 경우도 많아 일반백성들에게 널리 이용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차는 감기, 설사병, 추위나 더위로 오는 병, 체증, 가슴앓이, 고기의 독, 임질, 학질, 두통, 염병 등 여러 가지 질병을 치료한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떫은 것은 임질에 효과가 있다고 하였으며, 여기서 떫은 것은 늦게 채취한 노차老茶를 의미한다. 또 마지막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에서 언급한 효능은 모두 직접 경험을 통하여 터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차에 인삼이나 생강, 복령을 넣어서 약으로 마시기도 하고渴思茶鼎煮蔘笭, 예로부터 약효가 알려진 뽕잎을 넣어서 약용으로 마시기도 했다.(桑茶香潤更搜腸) 또한 “병후에 메마른 창자 우레 소리 들리니, 생강과 인삼을 차에 잘라 넣어 끓여 마신다(枯腸病後如雷吼 手切薑蔘點小茶-(夜吟))고 했다. 이 밖에도 약 처방에 차가 들어 있는 경우를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단차는 신선들이 먹는 불로장생의 만병통치약이라든가, 비싼 약재를 구하기 힘든 일반 백성들에게 차는 가정상비약 또는 응급처치용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차를 약으로 마신 흔적은 근․현대로 이어지는 전승적 맥락도 파악된다. 이와 관련하여 지리산에서 70년째 차를 만들고 있는 정재연 할머니(경남 산청군 시천면 동당리) 역시 차를 약용으로 마셨던 기억을 구술했다.

정재연할머니.
정재연할머니.

친정은 현재 살고 있는 동당리에서 약 5리 정도 떨어져 있는 내대(거리미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신천리 보안마을이다. 자연부락으로 나뉘어져 있어서 그렇지만 거의 한동네나 마찬가지이다. 친정 마을인 보안에는 신천국민학교가 있다. 지금 동당리의 아이들은 친정 마을의 학교를 다녔다고 한다. 할머니는 신천국민학교 졸업이 최종학력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친정어머니의 찻일과 가사를 돕다가 열아홉 살이 되던 해에 박종숙(朴鍾淑, 1934~2004)씨와 혼인하고 현재 살고 있는 시댁 마을인 동당마을로 들어와서 현재까지 살고 있다.

당시에는 얼굴도 보지 않고 부모들이 정혼하면 시키는 대로 했던 시대라 사랑이 군대에 갔다가 휴가를 받아 집에 온 틈을 이용해 결혼해서 살았다. 6남매 중에 사랑은 장남에 장손이었다. 며칠 만에 사랑은 군대로 귀대하고 혼자서 시집살이를 시작한 것이다. 그때부터 봄이 되면 시어머니의 찻일을 도왔는데 고된 시집살이에 병이 나면 늘 작살차를 마셨다. 약으로 복용한 것이다. 당시에는 대대적으로 제다를 많이 했던 때는 아니고 그저 식구들 약으로 만들어 먹는 것이 목적이었다.

“머리가 아프다고 하면 이거 달이라, 배가 아프다고 해도 이거 달이라, 고마 몸살이 나도 이거 달이라 해서 약으로 먹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다시 찻일하고 밭 매고 그렇게 고된 시집살이였다. 차를 뜨겁게 푹 끓여 마시고 땀을 내고 나면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아 만병통치약쯤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땀을 빼고 몸을 갱신했다. 또 설탕을 큰 숟가락으로 하나 타서 마시면 맛있는 음료였다. 모든 병에 오로지 약은 한 가지 작살차였다. 설탕도 나중에 말이지 시집가서 당시에는 사카리라고 단맛을 내는 재료를 넣고 마셨다고 한다. 또 토종벌꿀을 한 숟가락 떠 넣고 휘 저어서 마시기도 했다.

이렇듯 고려시대부터 향차는 조선시대, 근․현대까지 전승되고 있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블렌딩티(Blending tea)라든가 플레이버리티(Flavory tea)라는 용어로 일반인들에게 더 친숙하다. 전통적으로 향차는 일반백성에 이르기까지 널리 이용된 약용차 중의 하나였고, 음료로서의 기능보다 약재로서의 기능이 더 크게 작용했다. 또한 약차는 조선시대 향약의 전통위에 치료 경험이 축적되면서 간단한 단방약에서부터 일상상음용으로까지 발전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서 부풍향차는 지역 차문화의 기준을 설정하고 있다.

Ⅳ.《부풍향차보》의 음․장다법과 역사문화적 의의

부풍향차는 차 여섯 냥에(茶六兩) 약재 한 돈을 매양 각각 넣고(每各一錢) 물 두 잔을 붓고(水二盞) 반이 될 때까지 끓이다가(煎半) 차를 휘저어 섞어 주면서 불에 건조한다.(拌茶焙乾) 여기까지가 부풍향차의 제다법이다. 완성된 차를 베자루에 담고(入布帒) 건조하고 서늘한 곳에 둔다.(置燥處) 이 대목은 부풍향차의 장다법이다. 마실 때는 깨끗한 물 두 종을(淨水二鍾) 먼저 탕관에 붓고 끓인다.(罐內先烹) 탕관의 물이 여러 차례 끓어오르면 다관에 따른다.(數沸注缶) 다관에 차 한 냥을 넣고(入茶一錢) 뚜껑을 닫고 차가 진하게 우러나면(蓋定濃熟) 뜨겁게 마신다.(熱服) 여기까지는 부풍향차의 음다법이다.

차를 우릴 때는 화덕에 탕관을 편하게 앉히고(爐可安罐), 다반에는 다관과 찻잔 찻종을 놓(고 차를 마신다.)는다.(盤容置缶鍾盞) 여기는 찻그릇과 찻자리를 고스란히 정리한 부분이다. 제다에서 찻자리까지 차를 세는 단위는 두 번 나온다. 냥兩(茶六兩-차)과 전錢(入茶一錢-차)이 그것이다. 향약재를 가미하기 위하여 차를 넣을 때는 냥兩이고 약재랑 섞어 만든 차를 음다할 때는 錢이다. 또 차에 향약재를 넣을 때 향약의 단위도 전錢(每各一錢-약재)으로 쓰고 있다. 단위의 기준이 애매모호하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부풍향차가 떡차로 추정되는 단서로 이상의 자字를 들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단위들이 부풍향차의 형태를 단정하는 결정요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제다에서 장다, 음다를 포함한 찻자리까지를 정리하면 다음 <표 1>과 같다.

 

방법

순서

공정

원문

재료와 단위(방법)

비고

제다

차 여섯 냥에

茶六兩

차/여섯 냥

 

약재 한 돈을 매양 각각 넣고

每各一錢

약재/한 돈

 

물 두 잔을 붓고

水二盞

물/두 잔

 

반이 될 때까지 끓이다가

(煎半)

차와 약재/반, 湯

 

차를 휘저어 섞어 주면서 불에 건조

拌茶焙乾

차․불(휘저어 섞음)

 

장다

완성된 차를 베자루에 담고

入布帒

차․베자루/베자루

 

건조하고 서늘한 곳에 보관

置燥處

습기배제, 청량유지

 

음다

마실 때는 깨끗한 물 두 종을

淨水二鍾

물/두 종

 

먼저 탕관에 붓고 끓이기

罐內先烹

탕관/일탕법

 

탕관의 물이 여러 차례 끓어오르면 다관에 따르고

數沸注缶

탕관․다관(상투법)

 

다관에 차 한 냥을 넣고

入茶一錢

차․다관/한 냥

 

뚜껑을 닫고 차가 진하게 우러나면

蓋定濃熟

차․뚜껑

 

뜨겁게 마신다.

熱服

(일탕상투법)

 

다석

차를 우릴 때는 화덕에 탕관을 편하게 앉히고

爐可安罐

차․화덕․탕관

 

다반에는 다관과 찻종 찻잔을 놓(고 마시)기.

盤容置缶鍾盞

다반․다관․찻종․찻잔

 

<표 1>과 같이 제다에서 찻자리문화까지를 정리하면 매우 일목요연하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운해가 2) 차본(茶本)에서 서술한 내용을 제다로 볼 것인가? 차의 기본적인 상식선으로 볼 것인가의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기 발표된《부풍향차보》의 연구에서는 2) 차본(茶本)을 제다법으로 인식하여 부풍향차를 떡차로 해석하였다.(각주 4), 5))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다르다. 이운해는 차의 제법을 따로 기술하였다. 만약에 떡차로 제다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면 제법에 차를 만드는 방법부터 기술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운해는 제법에서 차에 향약재를 섞어 흡수되도록 하여 가향의 향차 만드는 법만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방법은 섞어 끓이는 것이고 이 과정에서 흡착이나 착향은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다.

필자가 분류한 ‘2) 차본(茶本), 차의 기본적인 기능과 작용’에서 ‘自十月至月臘日-찻잎은 시월에서 동지달 납일까지도 채취한다.’를 보면 이운해는 부풍향차를 늦봄이나 여름에 만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서 음다법도 여름에 주로 사용하는 상투법을 썼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운해는 산차를 만들었을 개연성도 있어 보인다. 왜냐하면 4) 제법에서 말하는 제다법이 산차의 상태일 때 차의 향을 가미할 수 있는 반차의 공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전에서는 떡차의 형태라는 것을 찾을 수 없다. 차 여섯 냥(茶六兩)이라는 도량형도 산차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운해는 늦봄이나 여름에 찻잎을 따서 산차를 만들었지만 차의 상식선에서는 ‘흔히 自十月至月臘日-찻잎은 시월에서 동지달 납일까지도 채취한다.’라고 덧붙였다.

<표 1> ①에서 ⑤까지를 보면 부풍향차를 떡차로 만들었다는 언급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제법에서의 차와 음다법에서의 차가 동일한 차가 아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완성된 차를 장다할 때의 방법론에도 차와 약재를 따로 분리한다는 말도 없다. 향차를 만들기 이전의 제다법이 기술되지 않았기 때문에《부풍향차보》에서는 차의 형태를 논하기보다 향약재를 첨가한 제다법과 차의 효능에 핵심이 있다.

더욱이 장다법에서 이운해는 ‘入布帒-건조한 차를 베자루에 담고’라 기술하였다. 우리 차문화사에서 떡차를 베자루에 담은 기록은 거의 없다. 꼬챙이나 끈에 꿰어서 시렁에 걸거나 처마 밑에 꿰미로 보관하여 상온에 자연(후)발효를 위한 장다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이운해의 부풍향차의 원형을 그대로 드러낸다. 기존의 연구가 2)의 차본(茶本), 즉 차의 기본적인 상식을 제다법으로 해석하고 부풍향차를 떡차로 보기 때문에 부풍향차의 기존 연구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던 것이다. 부풍향차는 음다법과 장다법에서 이미 2) 차본(茶本)이 제다법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이것이 이운해가 말하는‘方製新’이다.

부풍향차를 떡차로 볼 수 있다는 것은 ‘入茶一錢-다관에 차 한 냥(돈)을 넣고’인데, 이것 역시 차의 부피나 무게를 재는 하나의 단위이고 방법일 뿐이다. 그렇다면 향차 제다 이전의 제다법이 없어 茶本을 제다로 본다면 이‘方製新’에는 ①생엽을 사용했다는 점 ②차를 찌지 않았다는 점 ③향약재를 사용하였다는 점까지를 포함한다. 이운해의 원본《부풍향차보》의 발굴이 시급하다.《이재난고》의 필사에는 필적이 다소 차이가 있어 보이고, 다구를 표현한 그림 역시 덧붙인 흔적이 있다. 원본 훼손 가능성도 있어 보이지만 이운해의 원본은 또 다른 연구분석으로 부풍향차를 재조명하게 될 것이다.

첨언하자면 부풍향차는 향을 가미한 향약차다. 향약재를 휘저어 섞어 흡수되도록 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향차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지만 부풍향차는 그 제다법 자체가 매우 독특하다. 전남 해안지역의 청태전이나 강진으로 유배 와서 다산(丁若鏞, 1762~1836)이 만든 다산의 떡차와도 그 제다법이 다르다. 오늘날 함평(부루다원) 등에서 생산되고 있는 떡차의 형태와도 많은 차이가 있다. 과연 부풍향차가 떡차였을까? 지역 차산업의 발전방향을 견인하여 부안․고창의 지역적 향토성이 짙은 차로 복원하는 이․과학적 연구가 절실하다. 향차의 제다․음다법의 고찰로 이운해가 제안하는 찻자리도 복원 가능하다. 부안을 중심으로 지역 차문화의 독창성을 발휘할 때다.

Ⅴ. 마치며

《부풍향차보》는 지역성이 짙은 부풍․무장의 향차를 기록하였다. 이운해(李運海, 1710~?)가 부안 현감으로 부임한 翌年 1755년에 남긴 차에 대한 기록이다. 조선시대 차의 기록으로는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 당시 무장의 선운사 일대 찻잎을 채취하여 차를 만들고 지명을 부쳐《부풍보》라 제하고 묶은 책이다. 제다법과 마시는 방법, 차의 명칭과 도구까지 상세히 계량하여 기술하였다. 길지 않은 전문에 차의 생산 환경에서부터 가공․제다․장다․음다의 방법과 찻자리에서 쓰이는 다도구를 실측하여 그림과 함께 설명하고 있다. 실증적 토대를 중심으로 한 유례없는 독자성이 돋보인다 하겠다. 그러나 그 원본이 현존하지 않고 황윤석이 필사하여《이재난고》에 일기 형식으로 남아 있다.

차 여섯 량에 차명에서 말한 재료 각 한 돈이라고 했으니, 일상에서 발병하기 쉬운 한 가지 증상에 차와 두 가지 약재를 각각(各) 넣어 상음할 수 있는 향차로 만들었다. 부풍향차는 향을 가미한 향약차다. 향약재를 휘저어 섞어 흡수되도록 하여 만들었기 때문이다. 완성된 차는 7종의 향차다. 국향차菊香茶, 계향차桂皮茶, 매향차烏梅茶, 연향차黃連茶, 유향차香薷茶, 귤향차橘皮茶, 사향차山査肉茶라 하였다. 그림으로 첨부한 찻그릇의 조명은 통시적 상황 전달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당시에는 물식힘사발을 사용하지 않았고, 차는 상투하여 뜨겁게, 一湯上投法으로 마셨음을 알 수 있다. 炉․罐․缶․鍾․盞․盤(화덕, 탕관, 다관, 찻종, 찻잔, 다반) 6종의 찻그릇 그림을 통하여 영․정조 시대의 지역 차문화의 실상을 면밀히 밝혀냈다. 본 연구는 우리 차의 보편성을 이해하고 개별적․지역적 차문화의 특수성을 밝혀내는데 그 의의와 가치가 있다.

이렇게 차에 다른 향을 가미하여 마시는 역사는 중국 당대(唐代) 육우의《다경》에서도 발견된다. 그래서 흔히 香茶, 香藥茶로 정의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차의 음다문화가 내밀해지는 경향이 있었으나 면면히 이어져 온 역사를 반복한다. 해안지역이나 변방에서는 향약을 중심으로 하는 많은 의서들의 편찬으로 향약의 하나였던 약용차의 이용과 보급은 더욱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시대적 흐름으로 이운해는 향차 문화의 단편으로 《부풍향차보》를 기록으로 남겼다. ‘1755년에 지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라 하지만 필자의 소견은 조금 다르다. 그렇게 단정하면《부풍향차보》이전의 우리 차문화사는 무엇으로 말할 것인가가 의문이다.《부풍향차보》이전에 이목의 <茶賦>가 있고, 다서는 아니지만 분량이 비슷한 차시 기록 역시 다양하다. 자료를 면밀히 살펴보면 제다뿐 아니라 찻일 전체를 분석할 수 있는 자료들이 상당하다. 문예성을 띤 작품이든 역사성을 띤 작품이든 차문화사를 고구할 수 있는 자료로써 충분하다.

《다경》은 六之飮에서 파, 생강, 대추, 귤껍질, 수유, 박하 등을 넣고 마시는 것은 도랑에 물을 버리는 것과 같은데 세상은 이런 습속이 그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차의 진성을 빼앗는다는 염려에서이다. 초의는《다신전茶神傳》에서 ‘차에는 스스로 가지고 있는 본래의 색, 향, 미가 있으므로 과실이나 향기가 있는 풀을 쓰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소제小題를 ‘점염실진(點染失眞)’이라 붙였다. 풀이하면 잡것이 섞이면 진을 잃는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해석으로 차의 변용적 음다문화를 천시하는 풍조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우리 차문화사에서 향차나 약차의 제다 의도를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부풍향차보》는 ‘우리 차문화사의 편년을 앞당기는 중요한 자료’라기보다 영․정조 시대의 지역 차문화의 특수성이 강조된 다서다.

조선 전기의 이목의 <다부>가 우선 우리 차문화사에서 우선되는 기록이다. 문예성을 띈 작품이기 때문에 다서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견해는 매우 위험하다. 실제 제다나 차생활의 실상이 없는 점을 생각하면 이운해의《부풍향차보》는 실제상 최초의 다서로 보아 큰 문제가 없다고 분석하고 있지만 우리 차문화사에서 조선 전기를 위시한 제반 기록들의 우수성을 묵과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김시습․서거정의 차시자료에서부터 차문화의 일상이나 의례의 기록들을 폄하할 수는 없다.

기존 연구에서는《부풍향차보》에 제시된 각종 다구의 표준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고,《부풍향차보》가 한국 차문화사에서 차지하는 위상과 인식 제고에도 기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부풍향차보》의 위상은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부풍향차보》는 순수하게 차를 이용하여 만든 제다 방법이 아니고 제다법 자체 역시 전통이라든가 역사적 의의에서 매우 벗어나 있다. 더욱이 단방약 정도로 제다되어 사용된 흔적으로 봐서 우리 차문화사를 대변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부풍향차보》 이전의 우리 차문화사의 면밀한 고구가 필요하다. 제다법의 역사성, 전승성 그리고 다구의 기능이나 재해석이 필요할 것이다.

무엇보다도《부풍향차보》는 추론이 강한 고고학적 자료가 아니다. 인문학적 연구가 상상력을 기반하기도 하지만 실증적 차문화의 기록을 상상이나 추정으로 해석하는 데는 몇 가지 오류가 발견된다. 가장 큰 것은 ① 떡차라는 점 ② 맥과 즉 겨울에 보리알 같은 차를 따서 만들었다는 점 ③ 香茶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차를 뜻한다는 鄕茶라는 점 ④ 찻잎을 쪄서 떡차로 뭉쳐 만들었다는 점 ⑤ 향약재를 한 가지만 넣었다는 점 이외에 다기를 분석하는 몇 가지 오류들이다. 부풍향차는 역사성과 시대성이 반영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매우 실효성을 띤다는 점이다. 부풍향차는 지역적 특수성을 띠고 있는데 떡차의 보편적인 제다법으로 부풍향차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분석의 오류가 발생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부풍향차가 가진 ‘方製新’이라는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핵심을 상실하게 된다.

《이재난고》는 1757년 6월 26일자 일기 끝에 실려 있다. 한국 정신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탈초본으로는 제1책 172쪽과 173쪽에 해당된다.《이재난고》에 기록된《부풍향차보》의 남은 분량은 단 두 쪽이다. 우리 차문화사에서 바라는 것은 이운해의《부풍향차보》와 상확보(商確譜)의 발굴이다. 원전의 발굴 확인․연구분석이 간절하다. 이운해의 원본은 또 다른 연구분석으로 면밀한 천착이 가능하게 할 것이다. 2005년부터 저관세 티백류와 발효차의 수입 증가와 국내 과잉생산 등으로 국산 녹차의 재고가 쌓이고 있고, 차의 안전성 문제로 소비가 더욱 위축되고 있어 3600여 농가(2015년 차 생산실적현황)들의 고민과 한숨은 갈수록 늘고 있는 현실이다.

우리 차문화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차 산업의 절대적 대안이 필요할 때다. 외국 차 수입을 억제하는 길은 우리 차산업의 국가경쟁력을 시급히 높이는 길 뿐이다. 생산자단체와 연구기관의 협업으로 차종 및 제품의 다양화, 차별화, 소비의 대중화, 세계화를 이룩하도록 기술개발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지역의 차문화를 연구하고 지역 중심의 차문화산업의 경쟁력을 한 단계 높이는 발판을 마련하고 활용적 모색을 꾀할 시점이다. 이러한 연구의 확산이 절실하다는 것은 이미 학계와 문화계, 산업계에서 숙제가 된지 오래다. 더욱이 작금의 음료시장에서는 향을 가미한 가향차(Flavory tea)나 두 종류의 차를 섞어 만든 블렌딩차(Blending tea)가 젊은층 사이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시장의 수요에 부합하고 우리차 산업의 외연을 확장시키는 차원에서 가향차의 연구는 시급하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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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인문학부 연구전임교수 정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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